▲ 일러스트 이철원 / 조선DB
 몇 년간 국립중앙도서관을 매일 같이 찾아가 인문관의 서가 가운데 박혀 책을 읽은 적이 있었다. 서점과 달리 그곳에는 판매와 상관없이 만들어진 책들이 꽂혀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중에 특이한 책을 본 적이 있다. 평범한 여러 노인들을 만나 인터뷰한 걸 기록으로 남겨둔 책이었다. 그 시대를 살아간 민초들이 각자 시각에서 본 세상과 개인적인 삶의 스토리들이었다. 의도를 가지고 장식을 가미한 회고록보다 아침이슬이 맺힌 길가의 풀잎같이 훨씬 자연스럽고 신선했다. 
  
  1926년생인 어머니의 나이가 89세였다. 어머니는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어머니는 귀가 어두워지면서 입을 닫아버리고 침묵 속에서 살고 있었다. 어머니와 만주의 훈춘과 두만강가의 도문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해방 다음해에 결혼을 하고 남편을 따라 혼자 북에서 서울로 와서 살게 됐다. 6·25 전쟁시 북에 있던 가족이 폭격을 받아 몰살당했다. 남쪽으로 와 결혼을 해서 낳은 아들과 딸도 한겨울 걸어서 가는 끝없는 피난길에서 죽었다. 전쟁 중 휴가를 잠시 나왔던 아버지와 만난 끝에 피난지에서 태어난 게 나였다.
  
  “어머니는 어떻게 해서 만주에서 살게 됐어요?”
  “진사였던 할아버지가 무슨 죄목인지 몰라도 일본군 헌병대에 잡혀 징역을 살고 나와 만주로 가셨지. 거기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가 온 가족을 데리고 만주로 갔어. 내가 네 살 때 아버지 등에 업혀서 우리가 살던 원주의 개나리 골에서 만주의 용정까지 한 달을 걸어서 걸어서 갔어. 내 기억에 남아있는 건 앞에 걸어가는 엄마 등 뒤에 바가지가 매달려서 흔들거리는 거였어.” 
  
  일제시대 동아일보를 보면 토지를 잃은 조선의 많은 유랑농민들이 먹고 살기 힘들어 중국으로 넘어갔다고 했다. 그게 나의 뿌리였다. 친가의 증조부도 할아버지도 만주에서 농사를 지었다. 할아버지는 살았을 때 내게 어린 시절의 추억을 이렇게 말했다.
  
  “흙먼지만 풀풀 나는 메마른 땅에서 하루 종일 호미질을 해도 수수밥도 먹기 힘들었지. 참 만주에는 먹는 흙이 있어. 말랑말랑한 게 떡 같았어. 그것도 먹었단다. 난 사는 게 너무 힘들어 열네 살 때 기차를 훔쳐 타고 러시아 국경을 넘어갔단다. 거기서 소치는 사람들한테 일꾼으로 들어가 살았지.”
  
  중국 소설 ‘붉은 수수밭’에 묘사되는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이 우리 집안이었다. 같은 만주에 살던 가난한 어머니의 집안에 대해 다시 물었다. 
  
  “어머니, 만주에서 살 때 기억나는 게 있어요?”
  “온 가족이 비참하게 살던 게 기억나. 우선 중국 사람들하고 말이 통하지 않았지. 우리 가족은 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땅이 있는 것도 아니었어. 우리 어머니가 중국 동네에 가서 일해주고 양식을 얻어왔지. 그때 중국에서 쌀이 아닌 조밥을 먹었는데 숟가락 위에서 조밥알이 후루루 떨어져 내렸지. 그 밥을 입에 넣으면 입안이 까끌까끌했어. 우리는 대가족이었어. 아버지는 가족뿐 아니라 두 남동생과 여동생까지 데리고 갔어. 참 막연했지. 고모가 네 살짜리 나를 등에 업고 동네 나가면 내가 불쌍하다고 동정하면서 감자를 한두 알 내줬어. 고모가 그걸 얻어서 나를 먹였어. 중국인들 사이에서의 삶이 너무 힘들었어. 삼촌들이 풍속도 다르고 먹고 살기 너무 힘들다면서 차라리 두만강 너머 조선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아버지를 졸랐어. 그래서 가족이 다시 회령으로 옮겨 살게 된 거지.”
  
  “회령에서는 어떻게 살았어요?” 
  “회령에서도 가장 밑바닥 삶이었지. 아버지는 이미 나이가 있어 막일을 하기는 힘든 나이였어. 한 입이라도 덜기 위해 작은 삼촌은 집을 나가 과자 만들어 파는 일본인 밑에 일꾼으로 갔어. 큰삼촌이 저녁이면 어깨띠를 매고 좌판에 먹을 걸 몇 개 담아 시내에 팔러 다녔지. 먹고 살기 힘드니까 내가 일곱 살 때 엄마가 나를 다른 집에 보냈어. 그 집에 가서 애를 봐주면 그래도 세 끼 밥은 굶지 않고 얻어먹을 수 있다는 거지. 그래서 그 집으로 갔어. 일곱 살인 내가 그 집 아이를 업어 줬는데 허리가 휘는 것 같았어. 아버지 엄마와 동생들이 보고 싶어서 맨날 울었어. 그 집 아이들이 학교를 가서 공부를 하는 걸 보니까 너무 배우고 싶었어. 그래서 종이에 글자를 써서 아이를 보면서도 남이 보지 않으면 그걸 저고리 품에서 꺼내 외우고 다녔지. 그러다 어느 날 아버지가 날 찾으러 와서 집으로 돌아갔어.”
  
  한 세대 위인 부모의 어렸을 때의 참담하고 적나라한 가난의 모습이다. 할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철저하게 스스로 가난에 익숙해지도록 교육시켰다. 어디를 데리고 가도 길바닥 좌판에서 양념간장 조금 뿌린 쭈그러진 양재기에 담긴 싸구려 국수를 먹게 했다. 어렸던 내가 창피하다고 하면서 가게에 가서 사달라고 떼를 쓸 때 할아버지는 배에 두르고 있던 전대를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여기 이게 다 돈이다. 그런데 저기 가는 양복 입고 넥타이를 매고 고급음식점에서 요리를 먹는 놈들을 봐라. 겉만 번드르르하지 주머니는 텅 비었어. 너는 어떤 인간이 될래?”
  
  시골 오지를 다니면서 사향 같은 한약재를 사다가 종로의 한의원에 넘기던 할아버지는 죽을 때까지 광목저고리와 바지를 고집했다. 아무리 돈이 있어도 노무자 합숙소에서 잠을 잤다.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품팔이 뜨개질부터 시작해서 여러 가지 일을 했다. 마지막에 하나 얻은 외아들인 나에게 무서울 정도로 가난 훈련을 시켰다. 그리고 철저하게 바닥의 시각에서 세상을 보고 겸손하라고 했다. 내가 마흔 살에 작은 법률사무소를 차리자 어머니는 평생 무섭게 모은 돈으로 서초동 법원 담 아래 4층짜리 빌딩을 사 주면서 당부했다. 
  
  “우리 아들이 돈에 팔려 영혼을 잃어버린 변호사가 안됐으면 하는 엄마의 마음으로 엄마가 빌딩을 사 줍니다. 어떤 경우에도 비겁하거나 더러운 짓으로 힘든 사람들 마음에 멍이 들지 않게 하세요.”
  
  어머니 덕에 나는 단번에 반석 위에 올랐다. 돈 몇 푼에 더러운 일에 가담하지 않을 자유를 얻은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이었다. 어머니가 꽁꽁 숨겨놨던 현찰과 수표를 내놓으시면서 말했다.
  
  “5억 원을 만들어 너에게 주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다 채우기 전에 죽을 것 같아. 그래서 부탁을 하는 건데 내가 죽고 나면 내가 전해 주라고 하는 사람들한테 그 금액들을 내 마음이라고 하면서 꼭 전해주거라.”
  
  어머니는 손자와 손녀 그리고 평생 기억에 남았던 이웃이나 친척들에게 전해 줄 돈의 액수들까지 구체적으로 정해 내게 지시했다. 장례식에 문상을 온 사람들은 장례가 끝난 후 성당 앞 음식점에 가서 삼계탕을 사드리라고까지 정해주었다. 어머니는 뜨개질 품팔이를 하면서도 마흔 살에 동생을 입양했다. 엄동설한에 누군가 낳고 가난한 우리 집 앞에 버린 여섯 달짜리 아기였다. 어머니는 그 아이를 등에 업고 일을 했다. 
  
  아이가 자라나서 어른이 되고 결혼을 하고 딸이 간호사가 되어 공부를 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뜨개질을 하면서 무섭게 모은 돈으로 이문동에 땅을 사 둔 게 있었다. 어머니에게 생명이나 마찬가지인 땅이었다. 어머니는 죽은 후 입양했던 여동생 모녀가 먹고 살 수 있도록 그 땅을 주라고 유언했다. 남들이 인색하고 성격이 강한 함경도 여자라고 한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나는 어머니로부터 받은 미션을 하나하나 수행해 나간다. 부산으로 내려가 무료 요양원에서 삶의 마지막을 쓸쓸하게 보내는 친척 누님을 만났다.
  
  “엄마가 막 시집와서 누나 자랄 때 보면서 정이 들었었대. 돌아가시면서 이 돈 전해주라고 했어.”
  
  나는 어머니가 전해주라는 돈을 요양원 침대 밑에 넣어주었다. 머리가 파뿌리 같이 된 노인의 눈에서 하얀 눈물이 흘렀다. 70년 전 어머니가 새댁일 때 앞집 꼬마를 찾아갔다. 칠십대 중반의 노인이 었다.
  
  “어머니가 새댁일 때 앞집 꼬마인 아저씨한테 정이 들었었대요. 돌아가시면서 나중에 만나 뵙고 맛있는 저녁이라도 꼭 사드리라고 하셨죠. 이건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나는 어머니의 마음이 들어가 있는 봉투를 전했다. 돈을 받는 노인의 눈에서 맑은 눈물이 떨어졌다. 어머니의 멋진 마지막이었다.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가난과 고통은 엄청난 정신적 축복이다. 가난한 집 깨어진 창문에도 따스한 햇볕은 들어오고 처마 밑의 얼어붙은 고드름에서도 아름다운 무지개를 볼 수 있으니까.

글: 엄상익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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