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위한 교양( 문화, 공부)

2022.07.03 11:45

김일하 조회 수:5

제5장. 2001년, 59세, taxi 를 탓는데 교통사고.

  1. 사람의 일생도 나라의역사도 강물의 흐름과 같다. 영원히 끊임 없이 흘러 간다.

    2004년4월 3일, 부친이 87세의 나이로 사망 했다. 병명은 급성페렴. 돌아가시기 직전

까지 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말라서 떨어지는 낙옆마냥 조용히 돌아 사셨다. 나는 어릴때, 아버지에게 자주 매를 맞았고, 울었던 기억이 있다. 그럴때 마다, 아버지는 늘 이렇게 말 했다. "남자란 양친이 죽었을 적 외에는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된다" 라며 마치 연극에서 배우가 하는 독백같은 말을 들어 왔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가 돌아 가시자, 눈물이 나질 않았다. 첯째는, 오랜동안 어머니와 같이 년로하신(치매) 아버지를 간호 하느라 지쳐 있었고, 해방되었다고 하는 심리작용에서 온 것이, 솔직히 컷다고 하겠다. 아버지의 죽엄을, 간호 하면서도 은근히 어지의 죽엄을 바라고 있었다고 하는 생각 마저 있었을 것이 라고 생각 했다. 

立川昭二 씨의, "日本人의 사생관, 築摩서방"은, 西行이라든가, 鴨 長明, 吉田兼好, 松尾芭蕉등 수십명을 예로 하며 그들의 사생관에 대하여 쓰고 있다. 西行高隆에 대해서는, 나도 소설을 포함, 세권의 책을 썻고, 鴨 長明을 위한 책 한권과, 吉田兼好와 松尾芭蕉에 관한 책도 각 세권씩 썻다. 立川씨 책에 나오는 인물들은 나에게도 흥미로운 대상들이 었기 때문에 중요시 하고 있었다. 北里(HokuLy)대학의 교수였던 씨는, 의료를 통해서 즉음의 문화사를 써 보려고 했다. 같은 인물을 보고 있는데도, 관점이 전연 다르게 보고 있다는데, 깜짝 놀라게 하는 놀라움이 있었다. 그는 책의 첫머리를 이렇게 쓰고 있다. " 日本人들은 샐과사를 어덯게 생각 하고 있었던가" 日本人들의 사생관을 대표적인 고전(古典)속에서 찾아 보면서, 그들의 삶의방법, 죽는 방법에 접촉 하면서, 그들의 심성의 뿌리(基層)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사생관, 오늘을 살고 있는 그들 자신의 문제로서 생각 해 보려 했다"

먼저 西行(SaiGo)를 내 세운다. 첫머리의 글은 "꽃과달,,,,,죽을장소와 죽을 떄" 西行의 유명한 " 원하기로는 꽃밭에서 春死(봄에죽는것)하는것, 그것도 如月에 望月 하면서 (음력2월 달을 바라보며)" 라고 하는 句로, 잘 알려 진 노래 이다. 여기에는, 언제, 어디서 라고 하는 방법을 갖이고 죽느냐 하는, 日本人들의 이상이 나타나 있다고 하겠다. 西行은 그의 桂句 마저 대중들에게서 존경을 받았던 것이 었던 것 일까. 이것은 나의 의견인데, 이 사세(辭世)의 노레는, 그가 죽기 7개월전에 지은 것이다. 그 당시는 가을이 였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그가, 도저히 꽃이 피는 봄까지는 살아 있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 통념이 었다. 西行은 모든 이들이 말 하는 "내일 죽을 것이다" 라는 가운데에서, 어찌 되었던 간에 분발하며 7개월을 더 살아서, 그가 썻던 노래대로 꽃피는 봄달을 바라 보며 죽어 갔던 것 이다. 그것이 멋 졌다고 하면서, 藤原定家 가 이 노래를 新告今集에 수록 하였다. 아버지가 돌아 가셨을 떄, 아버지의 친구가  작은 책자에 떨리는 듯한 글씨로 이 排句를 적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禪明君에게, 花下西行과 함께 인연 이로다" 벗꽃이 지려고 하는 때 군은 SaiGo와 같이 죽었구나 하는 시구 였다. 나는 부친은 정말 좋은 때에, 잘 돌아가셨구나 생각하며 고마와 했다. 

두번재가 , 鴨 定明씨, "行河(흐른느 강물)는 流絶(흘러 끊이지 않고)하고, 그럼애도, 예전의 물은 아니로다. 고인물(沼水)에 떠도는(浮遊)하는 물거품(泡沫)은, 한편으론 없어 지며 또 한편으로는 나타 난다(消去消結). 영원히 한곳에 머무르는 법이 없도다.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의 거처라는 것도 역시 이와 같은 것인가" 이 句 역시 많은 日本人들이 외우고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외, 모두가 이것을 외우고 기억 하려 하는 것일까, 인생의 무상(無常)을 노래 하려고 하는 것 만은 아니다. 사람의 일생도, 나라의 역사도 강물의 흐름과 같아서 영원히 흘러 간다고 하는 관점이 日本人들의 가슴을 두드리고 있기 때문 이란다.

세번째가 吉田兼好이다, 兼好의 대단 함 이란, 승려이면서, "사후"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 일체 말 하지 않았다는데 있다. 내세를 믿지 않는 승려라고 하는 것은, 정말 생각할수 없는 부분 (含畜部外)이다. 무상(無常)을 부르짖으면서도, 어디까지나 현실주의자 였기 때문이다. "徒然草"에서의 인용문에, "변하기 쉬운 들판의 이슬, 사라지는 때 없고, 烏部山의 연기 사라질 때까지 산다면서 열씸히 배운다 해도, 어떠한 것으로 파 헤쳐도 안 되는 구나. 세상이 머물러 있지 않고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뛰어 나고 근사 하다. 도연초 제7단" 이세상이 머물러(정해져)있지 않고,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근사 하다고 하는 것은, 세상이 무상이기 때문에 좋다는 것이다. 내세를 믿지 않았던 兼好의 예리한 눈의 현실적인 눈이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芭蕉에 관하여 쓰고 있다. "幻往庵記"에 관해서도 쓰고 있는데 立川씨가 주목 했던 것은, " 들판에서의 해골여행" 이었다.처음 소개 한것이 "枯野(마른들판)에서의 骸骨(해골,죽음)여행"이 었다. 마즈막소개 한것이 " 깊숙한 細道".라는 排句속에서 "No(野)sarashi"라고 하는 것은, 해골, 사골(死骨)이라고 하는 의미, Edo(지금의東京)에 여행하기전에, 芭蕉의집, 芭蕉庵이 불타면서 주위가 온통 시체 투성이가 되었다. 芭蕉가 Edo로 여행을 떠나기전에 썻던 시에, "No(野)Sarashi 를 마음의바람(風)으로 온몸을 물들일 까나" 라는 일절이 있다. 즉 나는 해골이 되어 여행 한다. 라고. 결국, 그는 여행을 떠나면서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그의 "No sarashi 여행" 이라는 것은, 집이 불탈때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한, 菩提를 조상(弔喪)하기 위한 伊勢를 도는 기행문 인데, 立川씨는, "奧의細道"의 권두어 삼아, "옛사람들도 여행하면서 많이 죽었다" 라고 한 옛이야기를 들 먹이며, 늙어 여행이라고 하는 것은 죽음과 이웃 사촌이라는 것을 쓰고 싶었던 것일 게다.

2. 유족에게는, 환자의 문제가 끝이 났어도, 오랜동안 그 슬픔은 그들의 가슴속에 남아       있게 마련이다. 

내가 학생일 떄, 무의식중에 감탄 하면서 읽었던 책에, 坂口安吾의 "타락론(墮落論),新潮문고"이 있다. 아니, 나만이 아니라 대다수가 이책을 읽으며, "타락하는데 까지 타락 해 보자"라는 安吾의 주장에 공명 하면서 살아 보려 했다. 2001년 여름, "주간 AsaHi(朝日)" 의 Kurahpia 기획에서, "꿈의직업"이라고 하는 기획을 했는데, 나는, 거기서 坂口安吾의 역을 하고 싶다 고 신청을 했고, 그의 모습을 하고 사진을 찍었다. 그것이 이 책 표지 뒷면에 있는 사진 이다. 촬영을 위하여, 坂口安吾의 외아들인 Professional cameraman인 坂口網男에게 촬영을 의뢰 했다. 安吾씨는 1955년, 48세로 사망 했는데, 어느덧 그의 아들이 망부와 동년배가 되어 있었다. 그는 아버지를 꼭 닮아서, 아버지의 작업복같은것은 물론, 아버지의 이름이 적힌 원고용지, 쓰고 있던 도수높은 검은테 둥근안경등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유품을 몇점 갖이고 나왔다. 林 忠彦씨의 사진으로로 유명 해 진 서재를 재현 했고, 安吾(YashO)씨가 되어 촬영을 마쳤다. 촬영후, 나는 기분좋게 網男씨와 Shinzuku(新宿)에서 한잔 하고 개인Taxi를 얻어 탄 것이 오전 한시,網男씨를 집에 데려다 준 시간이 1시 20분경이 었다. 내집은, 國立이라는 곳이 었기 때문에 ,

初臺라는 곳에서 고속도로를 탓다. 자정이기 때문에 모두들 맹속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출구인 高井戶로 진입 하려고 하는데 "사고"가 일어 났다. 뒤에서 오던 무모한 운전자가 우리 차를 추월 하려다 내가탄Taxi 좌측을 드리 받았던 것이다. 2001년 7월 26일밤 2시, 나는 차 뒷좌석에서 실신 했다. 나는 시종 의식을 잃고 있었기 때문에, 전말은 전연 알수가 없었고, 나는, 그런 상태에서 향림병원 구급Center로 운송 되었다. 그리고, 가방속에 들어 있던 서류뭉치와 지갑에서, 신원이 파악되어 집에 연락이 다 았다고 했다.

다음날, 정형외과로 이송 전치 1개월 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실제로 회복 하는데는 약 1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오늘에도,그 후위증으로 목뼈에 통증이 있다. 이때 나는 죽었을 수 있었다고 나중에 생각 했다. 나는 피를 토한다 던가,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간 일발의 차이로 죽엄을 면 했기 때문에, 무엇인가 나에게는 강한 운이 따르는게 아닌가 하였다. 집에서 1개월가량 자리에 눕게 되면서, Elizabeth K. Rose/ 鈴木 晶 역의 "死의순간, 死와 그 과정에 관하여"(중앙문고)를 읽기 시작 했다. " 죽음을 부정하게 되는 사람은, 죽음에 도전하면서, 그것을 극복 하려고 할 수 밖에 없다. 맹열한 Speed로 고속도로를 달리면서도 사고사를 당하지 않았다 던가, Vietnam 전쟁에서 무사하게 귀환 했던 사람들은, 홋시, 자기에게는, 죽음으에 대한 면역이라도 있는양 느낄 수도 있겠다. 우리들은, 우리측의 전사자의 10배나 되는 적을 죽였다,,,,,, 이런 News를 매일 같이 듣고 있는데(vietnam 전쟁시), 이것들은, 우리가 원하고 바라는(願望) 것에서 오는 것은 아닌지,,,.만약, 국민전체가, 사회전체가 죽엄을 겁내면서, 죽음을 인정하지 않게 된다면, 우리들은 파괴적인 자위수단에 호소 할 수 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다. 전쟁, 폭동, 일방적인 살인, 그외의 범죄를 수용과 존중을 갖이고 죽음을 바로보지 못하게 되는 증거 일 찌도 모른다. 한편으로, 사후의 삶,,,,, 이것 자체도 죽음의 부인이라고 할수 있겠지만,,,,이런것을 정말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도 이제는 거이 없게 된 현실에서, 이제 사후의 삶을 기대 할수 없게 된 이때, 죽음에 대한 생각도 바뀌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내세에서, 고생하며 살았던 이생의 삶이 보상 받지 못하게 된다면, 정직하게 살았던 의미가 없어 진다. 만약, 어떤 사람이, 사교(친교)나, Dance Party 같은 오락을 위하여, 거기에 희망과 목적을 두었다면, 종교를 정말 믿었던 사람들의 슬픔을 이해 할수 없을 것이고, 거기에 기회를 부여 하는 의미도 없게 되는 것은 당연 한 일이 되곘다. 모순같이 들릴 찌 모르겠으나, 사회가(과학이) 죽음을 부인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면 갈수록 그것에 반하여, 종교가 사후의 삶, 다시말하면, 不死를 믿는 사람들을 많이 잃어 버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사회가 죽음을 인정 할 수 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다. 환자의 입장이 되고 보면, 이것은 불행한 반전이 아닐 수 없다. 제 멋대로 이긴 하지만, 종교에서의

죽음의 부인,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서의 고생과 고통을 사후 세계에서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신앙이, 믿는자들의 희망과 목적을 약속 했던 것인데, 사회의 진보(과학의 발달로)로 인한, 죽음의 인정으로 희망과 목적이 없어 져 버렸으니 , 불안만 늘어 났고, 현실로 부터 도피 하려고, 죽음을 직시 하려는 것을 회피하면서, 살인을(전쟁을 이르 켜서) 하게 되는 , 침략성을 조장하게 된 것은 아닌가 해 본다." 이 책의 저자 " Rose"는,

1926년 Swiss, Zurich 에서 태어 났고, Zurich 대학을 졸업, New York Manhattern 주립병원, Colorado 주립병원 근무, Chicago 병원 Healig Center에서 "죽음과 그 과정"에 대한 Seminer를 시작 했다. 그러니까 이사람은, "죽음의 순간의 대화" "죽음의 순간의 자식들" "죽음의순간" 과 "죽음에 이르는(臨死) 체험"등 죽는 순간의 일들 만을 쓴 작가 였다. 사고가 났을 때, 나는 만취 상태 였기 때문에, 완전한 Relax 상태여서 생명을 구 했다고 생각 된다. 사고 당시 쾅하며 방망이로 얻어 맞은 기억 같은 것이 있었는데, 그후, 3시간 이상을 실신상태로 있었기 때문에 그 후의 일은 전연 기억이 없다. 이것은, "슈나이드만"의 "죽음으로 갈때, 그리고 남는것"이라는 page에서 말 했던 것 처럼, 만약, 그때 즉사 했더라면 아무 일도 일어 나지 않았던 것과 같이, 죽음의 순간은 이와같이, 인간의 지각으로는 인식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뒤에 살아 난 후에는 "알지 못 했다" 라고 밖에 말 할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번사고를 당하면서, 가족이라는 것을 생각 해 보았다. 이 책에는 " 환자가 죽은 뒤, 가족들" 이라는 항목이 있다. "환자가 죽은 뒤, 가족들에게 신의 사랑이 함깨 하시길 과 같은 말을 말하는 것 같은 잔혹하고 부적당한 말은 없다고 그는 말 한다. 가족중 누군가 돌아 가셨을 떄, 특히, 전연 예기, 내지는

기대하고 있지 않았던 죽음 일 때, 사람들은 분노하고 절망 중에 있게 된다. 이러한 감정은 밖으로 표출 시켜야 한다. 가족들은 부검에 동의 하면서도, 돌연 감정을 억제 못하고, 폭발하는 경우 마저도 있다. 그들은 잔혹한 현실을 숙지 하지 못 하고, 고뇌하며, 분노 하고, 어떤 경우는 멍 하니 되여 병원 복도를 그저 왔다갔다 하기도 한다" "많은 유족들은, 고인 생각에 집착, 몽상을 반복 하면서, 고인이 마치 살아 있듯 말을 거는 일까지 있게 된다" 외냐하면, 고인은 그들의 마음 속에 아직 살아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현실 생활에서 고립되어 있음으로, 중요한 사람의 죽엄이 현실이라고 하는 것을 직시 할수가 어렵기 때문 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 이것이 상실감에 대처하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 하며, 스스로 조소 하기도 한다. 받아드릴 수 없는 현실에 매일 매일을 지나야 한다는 것이야 말로 잔혹한 것일 것이다. 이러한 가족들의 욕구를 이해하고 고립 된 상황으로 부터 서서히 끌어 내려, 고인의 죽엄으로 부터 떨어 져 나오도록 우리들은 그들을 도와 주어야 하겠다. 이러한 행동은, 주로 젊은 부인이 남편을 잃었을 때,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인데, 저자는 이렇게 제안 하고 있다. "내가 여기서 이렇게 반복하며 강조 하려고 하는 것은, 유족들이 말을 한다 던가, 운다고 할 경우, 또는 그들이 소리 칠떄,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라는 것이다. 말을 시켜서 감정을 밖으로 내 보내 도록 해 주고, 언제던지 대화의 대상이 되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족중에는, 환자의 문제가 종결 된 후에도, 오랜동안 슬픔을 갖이고 있게 되는데, 환자의 병이 악성이라는 진단이 내려 졌을 때 부터, 사후 수개월 뒤 까지도 도움을 받아야 한다 던가, 마음의 뒷바침이 필요하기도 하다"

이 책에는, 말기 환자들의 Interview 등이 첨부 되어 있는데, 의사들은 말기 환자들에게 어덯게 대처 해야 하는것과 같은 실례를 예로 하고 있다. 특히, 암환자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사료 된다.

3. 宮澤賢治씨는, 法華經(법화경)을 적은 액자를 걸어놓고 있었다.

  國立에 있는 내집 벽에도, 宮澤賢治의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라고 하는 커다란 탁본 액자가 걸려 있다. 거기가 나의 침실이다. 나의 부친은 賢治를 좋와 했기 때문에, 그의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에도 한여름의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을 갖이고, 욕심은 없다. 결코 성을 내지도 않을 것이고,언제던지 조용하게 웃으면서, 살 것이다. 하루에 현미 4홉과 된장(Miso) 조곰하고, 야채를 먹으면 된다"로 시작 해서, 뒤에는, 추울때나, 한여름에는 천천히 걸으면서, 모두에게 우둔한 놈이라 불리우며, 남을 칭찬도 안 하고, 나라에 채용도 거부하고, 신변에 있는 사람에게 의지도 안 하고, 나는 살고 싶다"로 끝을 맺는다. 이것은, 高村光太郞이 쓴 석비(石碑)에서 탁본(拓本)한 것으로 만든 것인데, 한평정도의(일본식 Tatami 한장) 켜다란 액자 이다. 이것이 내 침대 머리 맡에 걸려 있다. 그래서, 나는 소학교 3학년때 부터, 자기전에,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않고" 하며 읽어 왔다. 그런데, 나의 반평생을 돌아 볼 때, 나는,"비에도 졌고 바람에도 졌다, 어찌 되었던 잘 된것이 아닌가" 하는것이 실상으로 됬다. 나는, 宮澤賢治의 문학을 좋와 했기 때문에, 전에 賢治미술관에 갔을 때를 그를 기억 하면서, 그의, "비에도 지지 않는다Memo연구"(築摩書房) 라고 하는 小倉豊文씨의 책을 구입 해서 읽었다. 거기서 나는 하나를 발견 했다.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겠다"의 원문은, 그가 그의 검은 Memo장에 썻던 것이 었는데, 이 책에는 그 도판이 실려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져 있다는 것에

눈이 멎었다. "좌우신변에 의지하지 않고 살고 싶다"라고 하는 옆에, "南無妙法蓮華經(나무묘법연화경)이라고 하는 경문이 쓰여져 있었던 것이다. 결국, 폭우에도 지지않고, 폭풍에도 지지 않겠다"라고 하는 문구는, "남무묘법연롸경"이라고 하는 문자를 쓰기 위한 서장에 불과 했다는 것이 된다. "폭풍에도 지지 않고 폭우에도 지지않겠다"라고 하는 것은 경의 서문이 었고, 賢治도 또한 法華經에 의지하고 있었다고 말 할수 있다. 씨는, 젊은 시절에 Edo 로 나와서, 國柱會 라는 국수주의적인 과격한 日蓮宗 이라는 종파에 일시적으로 적을 두고 있었다. 그의 집은 원래 眞言宗이 었는데, 親鶯의 靜土眞宗에서 日蓮宗으로 개종 했던 것이다. 내 말도 좀 해 보자. 부친이 사망 했을 때, 부친이 묘지를 사 놓았기 때문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은 앞에서 말 했다. 사 놓았던 高尾의 靈院에 새로운 묘를 만들어서 거기에 모셨다. 전의 사원은 日蓮宗이 었는데, 이번의 高乘寺는 曹洞宗이다. 우리집은 그때부터 曹洞宗이 되었다. 친척들중에는, "개종을 했는가" 라고 말 해 왔응 때, "아니, 묘가 있는곳이 高乘寺, 그 절이 曹洞宗임으로 그냥 曹洞宗이 좋은 것 아닌가"라고 대답 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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