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민속예술 , 민속극,

2022.12.07 13:00

김일하 조회 수:6

각론,

1. 민속극(民俗劇).

  조동일씨의 글(한국의 민속예술, 현데의지성 37. 임재해편), 민속극의 전개와 발전과정이라는 논문을 통 해 우리의 민속극에 대하여 알아보자.

1). 민속극의 기원,

   한국연극의 기원은 고대의 국중대회(國中大會)에서 발견 한다. 扶餘의 영고(迎鼓), 高句麗의 동맹(東盟), 濊(예)의 무천(舞天)등의 국중대회는 농사가 잘되게 하면서 나라의 안녕을 도모하는 "굿" 이었다고 생각한다. 馬韓(마한)에는 5월의 씨를 뿌린후에 한번, 10월에 농사가 끝난후에 또 한번 수십명씩 무리를 지은 사람들이 "함께 일어나고 서로 따르며, 땅을 낮게 밟고 높이 밟아손발을 서로 마춘다(陳壽"三國志魏志, 馬韓條) 고 했는데, 이러한 행위는 농사가 잘 되게 하는 주술적인 것으로 이해되었을 것이다. 농작물이 자라는 모습이나, 농사를 방해하는 자연의 횡포와의 대결을 몸짓으로 나타내는 것이야 말로 연극적 동작의 기원이며, 일정한 날을 정해서 많은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노는 이 핼사는 축제로서의 연극이 생겨날 수 있는 바탕이다. "三國遺事  (삼국유사)에 전하는 가락국기(駕洛國記)의 서두는 연극의 기원을 알아 볼수 있는 더욱 분명한 자료 이다. 駕洛國 건국의 역사를 기록 해 논것 같이 보이는 이 자료는 건국신화를 행동으로 나타내면서

또한 농사가 잘 되게하는 굿의 내용을 전 한다. 봄이 한창 무르익는 3월 계욕일(禊浴日)에 구지봉(龜旨峰)과 같은 신령스러운 산에 올라가 꼭대기의 흙을 파면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 놓아라"하고 노래 부르며 춤을 추는 것은 농사의 신 또는 생식의 신을 맞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어서 거행된 수로(首露)와 허후(許后)의 혼인, 首露와 탈해(脫解)의 싸움 또한 풍요를 돕기위한 남녀신의 결합이거나 농사를 방해하는 자를 격퇴하는 굿으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다. 맞이, 혼인, 싸움은 후대 마을 굿에서도 자주 보이는 바이고, 탈춤에서 보이는 극적사건은 바로 이런것들을 계승 하면서 이루어 졌다. 고대의 국중대회는 굿하는 자가 바로 정치권력의 담당자였으므로 생산을 촉진하는 목적외에 정치적인 목적도 분명히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정치와 굿이 분리 된 후에는 굿이 마을 단위로 전승 되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무리가 거행하는 행사가 되었으니, 서낭굿 같은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서낭굿은 마을의 안녕을 위해서 거행되는 생산 의례로서 맞이, 혼인, 싸움을 중요한 내용으로 삼는다. 농악대의 풍물잡이들이 신의 가면을 쓴 사람들과 함께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놀이를 하는 이러한 굿은 바로 탈춤의 기원이다. 신의 가면이 양반, 각시등 사람의 가면으로 전환되고, 신들 사이의 혼인이나 싸움이 사람들 사이의 혼인이나 싸움으로 이해되는 것이 탈춤의 출발이다. 굿에는 巫堂의 굿도 있다. 巫堂은 신을 나타내는 자격을 독점하고 있으므로 가면같은 것을 쓰지 않아도 굿을 할 수 있고, 생산을 촉진하거나 병을 퇴치하는데 필요한 주술적인 수단을 다채롭게 활용하고 있어서, 무당국은 농악대 굿과 구별 된다. 그런데 무당굿중에서 놀이라고 하는 대목은  맞이, 혼인, 싸움등을 행동으로 나타내면서 주술적인 목적을 달성하려 하는 것이지만, 주술적인 목적보다는 흥미가 더욱 중요한 것이 되고, 일상생활에서의 갈등을 표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감으로서 연극의 영역으로 들어 섰다. 이러한 무당굿놀이 또는 무극(巫劇)은 탈춤과 근사한 관계에 있는 또 하나의 연극이다. 이상에서 논한 바는 연극의 기원은 굿이라는 것으로 요약 할 수 있다. 굿은, 외래적인 영향으로 시작된것이 아니고, 어느나라에나 있는 것이며, 굿에서 극으로의 전환 또한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연극은 굿에서 생겨 났지만 성장과정에서 여러가지 외래적인 영향을 받았으리라 고 추측할 수 있고, 외국 연극이 들어와서 정착했을 가능성도 미리 부정 해 버릴것은 아니다. 서역등지(西域等地)에서 中國을 거쳐서 한국에 이르고 다시 日本으로 까지 간 문화의 유입은 삼국 시대 이래로 계속되었는데, 그중에 연극의 유입도 포함 되었을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사정때문에 한국연극의 기원을 외래 연극의 정착으로 설명하느데 까지 이르는 것은 지나친 속단일 수 있다. 百濟人 미마지(味摩之)가 남중국의 오(吳)나라에서 배워 日本에 전했다는 기악(技樂)이 우리 탈춤의 출발이었다고 하는 견해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李惠求,"산대희와 기악, 한국음악연구, 1957, 서울 음악연구원). 技樂은 탈춤이며오늘날까지 전하는 탈춤과 비슷한 점은 있지만, 技樂이 이땅에 정착되고 전승되었다는 증거는 찾기 어렵다. 그리고 절에서 하는 연극이 민중의 연극으로, 불교를 옹호하는 무언극(無言劇)이 불교를 풍자하는 화극(話劇)으로 바뀐과정도 논증이 필요한 문제점으로 남아 있다. 인형극(人形劇) 즉 곡두각시놀음은 "곡두각시"라는 말 자체가 외래어이니 대륙에서 온 놀이패가 갖이고 온 연극이라고 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그러나 곡두각시놀음은 탈춤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혼인, 싸움등의 형태를 갗춘 생산 의례적인 요소를 풍부하게 지니고 있으므로, 이것 또한 굿과의 관련을 따라서 그 기원을 밝혀야 하겠다는 반론이 제기 될수 있다. 산대희(山臺戱) 또는 나례희(儺禮戱)에서 탈춤이 시작되었다고 하는 견해는 한때 전설로서 통용되던 것이다. 그런데 산대희는 규식지희(規式之戱), 소학지희(笑謔之戱), 그리고 음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중에서 곡예(曲藝)인 규식지희나 음악은 연극이 돨 수 없는것이고, 소학지희만은 즉흥적인 대화로 이루어진 연극이지만 탈춤과는 거리가 멀다. 산대희 기원설은 산대희가 바로 탈춤이라는 착각에서 시작되어, 규식지희와 소학지희 결합에서 가면극이 이루어 졌다는 데까지 몇차례 수정되었지만, 그 어느것도 산대희와 탈춤의 이질성을 납득할 만하게 설명해 줄 수 없다. 나라에서

산대희 공연을 중단하게 되자, 산대희 공연에 동원 되었던 광대들이 각지로 흩어져 탈춤에 종사하게 되었다고 하는 속설도 받아드리기 어려운 것이다. 산대희 기원설에 의하면, 탈춤중에서 가장 먼저 이루어진 것은 서울근처의 산대놀이 이고, 산대놀이가 황해도 지방으로 전파되어 해서(海西)탈춤이 생겨나고, 경상남도로 전파되어 야유(野遊)와 오광대(五廣大)가 생겨 났다고 하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탈춤의 역사는 퇴보의 역사라고 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우리 연극의 여러형태는 이미 고대에서 싹이 보이기 시작 했고 오랜 기간에 걸쳐서 꾸준히 성장 해 왔으며, 고대 또는 新羅시대 까지는 있었던 상하민 합동의 굿이 사라진 후에는 하층민중의 것으로 되었고 민중의식의 성장에 따라서 굿에서 연극으로의 전환이나 연극으로의 발전이 이루어 졌다. 연극에 미친 외래적인 영향은 이러한 발전 과정에서 필요에 따라서 수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되고,전통을 단절 시키고 새로운 연극을 이식 히는데 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자세한 한국연극역사를 알고자 하시면 , Google에서  연극,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을  검색 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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