巫堂굿에서 "거리"란 ?

1. 정의;

  巫堂 굿의 한 절차로 세는 의례절차(儀禮節次).

2. 개설; 

  "석(席)" 또는 "석수(席首)"라고도 한다. 탈춤이나, 꼭두각시놀음의 "마당"과 비슷한 말이며, 연극의 "장(場)이나 "경(景)에 해당하는 우리 말이라고 할수 있겠다. 거기에 해당하는 말로 "굿"이라는 말을 그대로 사용하기도 한다. 산신거리(산마누라거리), 손님석, 손님굿 이라고 할때, "거리" "석""굿"은 모두 굿의 절차를 의미 한다. "굿"을 "제(祭)"라고 할 때에는 거리를 "제차(祭次)"라고도 표기 한다.

3. 내용;

   "거리"의 특색에 따라서 신화(神話)가 위주인 '거리'를 "풀이", 놀이의 성격이 강한 '거리'를 "놀이"라고 하는데, 성주풀이, 대감놀이가 각각 그 예이다. 굿은 이러한 거리로 단락지어 지는데 이것이 일정한 수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고 대체로 10여차에서 20여차로 구성된다. 굿의 규모나 목적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고 지역이나 巫女에 따라 순서가 일정치 않으며 변동이 있는것이 일반적 이다. 그러나 모든 "거리"가 그런것은 아니다. 예를들어 굿이 시작되는 "부정굿"과 굿이 끝나는 "뒷전"이나 '거리굿"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거리 이다. 다소 간소화 되기는 해도 그것이 생략되는 일은 없다. 그러나 굿의 어떤 거리는 없어서도 굿의 진행에 관계가 없는 반면, 그 굿거리가 없으면 굿이라는 구색이 없어지는 것이다. 예를들어 성주거리, 대감거리, 제석거리, 산신거리들이 빠지면 굿의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으며, 굿을 하는 목적도 결여되는 감이 든다. 이러한 경우에도 그것은 神을 모시는 절차가 빠졌을 뿐이지 그것이 다음 순서로 이어지는 계속성 때문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거리로서의 거리라는 뜻은 아니다. 따라서, 거리는 연극의 장과는 달리 연속성이 적고 독립성이 강한 점이 그 특징이라 할수 있다. 하나의 거리는 하나의 神이나 같은 종류의 神을 모시는 일정한 형식이 있다. 이러한 형식은 무복(巫服)의 종류로 표현 된다. 따라서, 무복을 보아서 神의 성격과 거리를 짐작 할수 있으며, 무복이 바뀌면 거리가 바뀌는 것으로 볼수 있다. 하나의 거리는 神을 청배(請陪,모시는)하고 神의 신탁인 공수를 내리고 떠나는 과정으로 되어 있다. 하나의 神을 모시는 거리에서는 이런 행위가 한번정도 이지만 많은 神을 한 거리에 모시는 경우에는 이러한 神을 모시고 공수를 내리고 보내는 과정이 되풀이 된다. 거리와 거리의 사이에는 쉬는 시간이 있거나 무악(巫樂)이 그치는 등 한 거리가 끝났음을 뚜렷이 한다. 때로는 쉬는 시간이 없이 연속적으로 진행되는 경우도 있으나 이러한 경우에는 무복만은 바뀐다.무복을 걸쳐 입고 하나씩 벗어 가면서 굿을 하는 경우도 있다. 또 거리에 따라서 巫女가 바뀌는 것도 흔히 있는 예이다. ("朝鮮巫俗의연구" 赤松智城,秋葉 隆, 大阪屋號서점, 1938)

무복(巫服)의 종류; 칠성옷, 신령님옷, 장군옷, 대신옷, 대감옷, 관복, 사신군복, 중국장군옷, 창부옷, 애기씨옷, 도령옷, 외신대감옷 의 12종류가 있다.(무복;한국민속연구, 김태곤, 집문당, 1981) (한국무당, 최길성, 열화당, 10981)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무복)참조.

먼저 장에서 부터 이번까지의 글과 댓글에서 굿에 대한 이모저모를 소개 했지만 실제로 굿의 전모를 알기가 아리송 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미심성을 한꺼번에 풀어 주는 굿의 "12거리"의 진행을 벽초 홍명희의 대하역사소선 "임거정(林巨正,전9권, 서울, 사계절출판사)제4권, 의형제편 1(122페이지)의 박유복이에 기록된 귀신 최영장군의 새마누라 맞이 굿 12거리를 읽으면서 확실히 알아 보기로 하자.(벽초선생의 명문장을 읽을

겸사로 긴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었으면 좋겠다)

박유복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도망치던중 미천골이라는 곳에서 길도 없는 덕적산 속으로 들어 갔다. 덕적산은 딴 이름이 덕물산이니 진달래꽃으로 이름 높은 진봉산 남쪽에 있다. 그 흔한 진달래꽃 조차 진봉산같이 많지 못한 산이라 아무것도 보잘 것이 없건마는 이름은 경향에 높이 났었다. 이것은 다름 아니고 오직 산위에 최영장군의 사당이 있는 까닭이었다. 최장군이 고려말년의 영웅으로 당세에 큰 공로가 있다고 유식한 사람들이 그 사당을 위하는가 하면 그런것도 아니고, 또 최장군의 무덤에 풀이 나지 않도록 원통하게 죽었다고 유심한 사람들이 그 사당에 많이 오는것도 아니다. 그 사당을 누가 세웠는지 세운 사람은 혹시 장군의 죽음을 불쌍히 여기고 또한 장군의 공로를 못 잊어 하였는지는 모르나, 그 사당은 장군당이라 일컫는 무당들의 밥그릇이 되고 최영장군은 최일장군으로 이름까지 변하여 무당들의 고주 귀신이 되었다. 장군당에 와서 치성을 드리면 병있는 사람은 병이 낫고 아들 없는 사람은 아들을 낳았다. 그 대신에 여러 사람의 재물은 무당의 손으로 들어 갔다. 대체 귀신이 있다고 잡고 말하더라도 최영장군같은 인물이 죽어서 귀신이 되었다면 총명하고 정직한 귀신이 되었으련만, 요사스런 무당 입에 놀아나서 장군의 귀신은 귀신으로 희한하게 잡탕스러워서 죽은 귀신이 산 사람같이 마누라가 있었다.그 마누라는 근처 동네에서 숫처녀를 뽑아다가 장군당 옆에 붙은 별채에 두고 밤이면 귀신이 와서 동침을 한다는 것이 었다. 그 마누라가 나이가 들거나 병이 들면 일변 내 보내며 일변 곧 대신을 뽑아 오는 까닭에 장군당 별채 침실이란 곳에 계집이 떠날 날이 없었다. 여러번 그 마누라가 바뀌어 내려오는 중에 한번 마누라로 뽑힌 색시의 부모가 딸 내놓기 싫어서 도망하듯이 타관으로 이사 나간 일이 있었는데, 장군의 벌역이 내려서 그집은 집대로 염병에 전가가 폭 망하고 산밑 동네에 까지 그 해가 미쳐서 그 해 연사가 흉년이 들고 못된병이 들어서 사람이 많이 사망 하였다는 것이 산밑 여러 동네에서 아이들까지 다 아는 이야기다. 장군의 귀신이 영스럽기 짝이 없는 까닭으로 근동 동민들은 이야기를 믿고 의심치 아니하며 누구든지 저의 딸이나 누이가 장군의 마누라로 뽑히기만 하면 의례 바칠것으로 생각할 뿐만 아니라 한동네 사람은 고사하고 근방 타동 사람까지 들 싼들을 대어서 아니 바칠수가 없었다. 그 마누라를 뽑는것은 무당이니 무당은 장군의 신을 빙자 하는 것이요, 그 마누라를 바치도록 주선 하는 것은 각동 동인 들이니 동임들은 장군도 위하고 동네도 위한다는 것이요, 그 마누라를 바치는 것은 부형이니 부형은 다시 말할것 없이 장군의 벌역을 두려워 하는 것이었다. 그 마누라가 병이 들어 일어나지 못하게 되어서 새 마누라를 뽑게 되었는데 날을 받아 각동 동임들이 한자리에 뫃여 신이 실려서 위엄있는 사내 목소리로  "나의 새마누라는 산상골 최서방의 맏 딸이다" 하고 말끝을 길게 떼어 포함을 주었다. 최서방의 맏 딸은 근동에서 얼굴이 이쁘기로 이름난 처녀니 나이 열 여덟 살이고, 보방골 박첨지의 막내 아들 열 네살 먹은 아이와 정혼하고 금년은 쌍년이니 그만두고 내년에 성취시키자고 두 집 부모가 서로 의론하여 작정하고 있는 터이 었다. 박첨지가 모방골 존위로 그 자리에 와서 있다가 이 말을 듣고 가슴이 내려 앉았으나 의뭉스런 늙은이라 선뜻 무당 앞에 나와 꿇어 앉아서 "최가의 딸이 여러 가지루 다 합당 하오나 장군님과 동성이니 어떠하올찌" 라고 슬며시 말썽을 이르켜 보았다. 이것도 전에 없던 일이라 다른 사람들은 혹시 장군의 노염이 내릴까 겁이 나서 눈이 둥그레 졌다. 아니나 다를까 신내린 무당이 기를 길길이 뛰면서 "이놈,무슨 소리냐 ! 나는 마누라가 동성동본이라도 좋지만은 더구나 본이 다르다. 그 색시는 너의 며느리감이 아니다." 하고 통통이 호령하여 다른 사람들이 일쩨히 꿇어 앉아서 "옳소이다. 옳소이다" 하고 말하는 중에 박첨지는 "미련한 인간이 무엇을 아오리까, 장군님 분부가 지당합소이다"하고 빌고 다시 두말 못 하였다. 최장군의 마누라감이 이와 같이 작정되어서 다시 생기 복덕 좋은 날을 받아  장군당 침실로 맞아 오게 되었다. 최장군이 새마누라를 맞자면 굿이 어러번 있지만은, 색시를 침실로 맞아 오는 날 사람으로 이를테면, 초례겸 신부례날은 큰 잔치가 있는 법이었다. 사흘 전기하여 각동 소임들이 장군당에 뫃여 와서 마당 앞에서 당집까지 황토 스무 무더기를 간격 맞춰 놓고 그날은 첫 새벽부터 각동 존위 이하 동임들이 모두 와서 무당들과 같이 큰 굿 준비를 차리었다.당집 안 일정한 자리에 작고 큰 전물상 들을 벌려 놓는데, 삼색실과와 백설기에 소찬 소탕을 곁드려 놓응 것이 "불사상"이요, 무더기 쌀과 타래실과 고깔꽂은 두부를 놓은 것이 "제석상"이요, 약주와 안주 외에 장군에 드리는 삼색예단을 놓은 것이 "대 안주상"이요, 떡시루 탁주동이 외에 도야지를 통샘이로 잡아 놓은 것이 "대감상"이요, 그 외에 군웅상과 상산상, 조상상은 큰 상들이요, 지신상, 호구상, 영신상, 선왕상, 건립상은 작은 상들이다. 경사상이라 상문상이 없고 안굿이 아니라 성주상과 터줏상이 없고 출물상이 없는 굿이라 무당 차지의 대신반이 없었다.(굿에는 공물이 아주 중요하다.자칫 잘못하여 어느것 하나 결하면 챠이콥스키의 무용극 "잠자는 미녀" 꼴이 되기 때문이다. 굿을 보러 갔을 때는 이런 여러 상을 눈여겨 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 이다. 이런 이유로 굿의 비용은 엄청 나다. 옮긴이 글). 최서방의 딸은 벌써 머리를 얹치어 당집 안 특별한 자리에 앉치고 그 부모가 딸의 양옆에 갈라 앉고, 당집 처마 아래에는 각동 존위이하 동임들이 문길만 틔여 놓고 늘어 앉고, 추녀 밖에 멍석을 연이어 깔은  굿자리에는 기대와 잡이와 전악들이 각기 제구를 갖이고 자리 잡아 앉고 마당 가에는 각동에서 뫃여 온 구경꾼들이 남녀노소 썩이어 빈틈 없이 들어 섰다.(신의주 약죽 소학교 5학년때, 할머니 손잡고 큰굿 12거리 구경갔던 정경이 생각 났다) 구경꾼들이 굿 시작을 고대고대한 뒤 원무당이 비로서 굿자리에 나와 앉고, 소위 주당물림이라고 추녀 안에 있던 사람을 모두 추녀 밖으로 내 세우고 나서 기대가 장구를 울리고 잡이가 제금을 치고 전악들이 저를 불고 피리를 불고 해금을 켰다. 주당을 물리고 나섰던 사람들이 각각 저희 자리에 가서 앉은 뒤에 기대가 다시 장구를 땅치니 이로서 큰굿 열 두 거리,

첫거리 부정풀이가 시작된 것이다. 기대가 장구를 치면서 영정 가망이 놀아 나느니 부정 가망이 놀아 나느니 한동안 지껄이고 나서 처음에 진부정을 푼다고 잿물 한 바가지를 들고 당집 안팎을 돌아 다니고 또 마른 부정을 푼다고 냉수 한 바가지를 들고 먼저와 같이 돌아 다니고 그다음에 부정 소지를 올린다고 백지 한장을 태웠다. 부정풀이가 끝난 뒤에 진작이라고 장군과 상산신령에 술을 올리는 절차가 있고 잠시 쉬었다가,

둘째거리, 가망청배가 시작 되었다. 가망청배는 신을 청하여 내리는 절차다. 기대가 전악들의 풍류에 마추어 장구를 치면서 가망노랫가락을 부르고 난 뒤에 원무당이 장옷을 입고 좌우손에 백지를 쥐고 밖에서 동서남북으로 돌아가며 사방에 절하고 당집 안에 들어 가서 장군신상 앞에 절 하였다. 그리하고 다시 굿자리에 나와서 백지들을 접어두고 왼손에 방울, 바른 손에 부채를 쥐고 한바탕 풍류에 맞춰 춤을 추다가  이ㅅ소리 하번 길게 빼며 풍류는 뚝 끄치고 공수를 주는데 공수를 받는 사람이 있을 법이라, 보방골 박첨지가 각동 존위중에 나이 제일 많고 입담이 제일 좋은 까닭으로 여러사람의몸을 받아 공수를 받게 되었다.

"내가 누구신지 아느냐? 위엄있고 공덕 많구 영검하신 최장군 아니시냐" 

"옳소이다"

"내가 새마누라 맞아 오는 오늘 같은 경사 날에 이것이 무엇이냐, 원숭이 입내냐 따짜구리 부적이냐 !" (하면서 무당은 부채를 쫙쫙 펴는데)

"미련한 인간이 무엇을 아오리까, 쇄 술로 밥응 먹어 인간이 옵지 개 도야지나 다름이 없아외다. 저희들은 이만 정성을 드리느라고 낮이면 진둥걸음을 걷사옵고 밤이면 시위잠을 잤소이다. 용서하여 주옵시고 소례를 대례로 받읍소사. 입은 덕도 많습지만 새로 새덕을 입혀 주옵소서"

하며 박첨지는 두손으로 싹싹 빌었다. 원무당은 공수 주다 말고 다시 풍류 맞춰 춤을 추고 춤추다 말고 또 이ㅅ소리 를 지르고 공수를 주는데 나중에는 나는 무어다 , 나는 무어다 하고 오방제신을 다 끌어 내었다. 공수끝에 원무당과 기대사이에 한차례 만수 받이가 있고 가망청배가 끝이 났다.

세째거리는 산 마누라 다. 산마누라는 곧 산상신령이니 농사에 도움을 주는 귀신이라고 상까지도 여러전물상 중간에 놓여 있다. 원무당의 모양을 보아라, 빗갓에 호수를 꽂아 쓰고 남철력에 도홍띠를 눌러 띠고 굿 자리에 일어 섰다. 처음에는 철럭소매를 잡고 늦은 장단의 풍류에 맞춰서 늘어지게 춤을 추다가 나중에는 칼도 쥐고 삼지창도 쥐고 갖은 장단에 신이 나게 뛰 놀았다. 춤을 끄치면 공수를 주고 공수를 끝이면 춤을 추어서 춤과 공수를 번 가르다가 공수며 춤이며 모두 끝이며 칼을 세워서 칼 사슬을 보고 창을 세워서 창 사슬을 보았다. 사슬은 점이니 점마다 좋와서 장군님 새마누라 잘 들어 오셨다고 박첨지 외에 다른 동임들은 얼골에 희색이 떠 올랐다. 산마루가 끝 났다.

네째거리는 대감놀이 이다.

원무당이 전립을 쓰고 쾌자를 입고 부채를 들고 대담들을 청배하는데 대감이란 것이 명색이 많았다. 밤이면 순역 도는 순역대감이며, 낮이면 어사도는 어사대감이며, 이담저담넘어 다니는 걸립대감이며, 이외에 부근대감이니 목신대감이니 열 두 대감을 낱낱이 둘수 었다. 춤추고 공수주고 하다가 나중에 무당이 부채를 내 흔들며 사망을 주느데 일보는 동임들이 손벌리는 것은 말할것도 없고 무당과 안면이 두터운 구경하는 여편네들 까지 치마자락을 벌리고 앞으로 나와서 재수사망을 가득히 받았다. 무당의 사설을 들으면 높은 산에 눈 날리듯, 얕은 산에 재 날리듯, 억수 장마에 비 퍼 붓듯이 , 대천바다에 물 밀듯이 재수사망이 이루어 진다는 것이다. 사망을 다 준 뒤에 "에라 만수 대 신이야" 소리가 연해 나오는 대감타령으로 대감놀이를 끝 마치었다.(이때 벌서 점심때가 되어 점심요기를 하느라 쉰다) 굿거리는 굿에 따라 변동이 있어서 몇째 몇째가일정한 것이 없지만은 큰굿 열 두 거리수를 빼는 것은 없는 법이라 점심이 끝난 뒤에 굿이 다시 시작 되어 거리 수를 채워 나갔다. 

다섯째 거리는 제석풀이 이다. 

무당이 머리에 고깔을 쓰고 몸에 백포장삼을 입고 목에 염주를 걸고 흰부채를 손에 쥐고 나서서 삼불제석을 청배하여  한바탕 춤도 추고 공수도 주고, (그 뒤에 잔깐 쉬었다)

여섯째거리 전왕 놀이로 뒤를 대었다. 

무당이 제석풀이 때와 같은 복색으로 춤 추고 공수 준 뒤에 바라타령을 시작하여 "바라를 사오 바라를 사오, 이 바라를 사옵시면 없는 애기 점지하고 있는 애기 수명장수" 이와같은 덕담 노래를 장단 마추어노래 하면서 바라시주를 거두러 다니고 굿자리에 돌아 와서 바라를 치며 아미타불관세움보살을 찾아 염불하고 나서 곧 삼불제석송덕하는 노랫가락을 가지고선 무당과 앉은 기대가 서로 "얼시구 좋다,절시구 좋다"하며 하나는 먹이고 하나는 받았다. 정왕놀이는 이것으로 끝이 났다.

일곱째는 군웅놀이 이니, 군웅은 조상대감이 란다. 무당이 빗갓쓰고 천력 입고 놀고

여덟째는 별상놀이 이니, 별상은 마마란다. 무당이 전립쓰고 군복 입고 놀고, 

아홉째는 호구놀이 이니, 호구는 아기씨 란다. 무당이 다홍치마 입고 면사포 들고 놀았다 무당이 복색을 연해 변하는 중에 

열째 창부놀이, 창부놀이에는 초립쓰고 색동옷을 입었다. 창부놀이는 말인즉 무당들이 선생귀신을 청배하는 것이라 대감놀이와 같이 사망도 주거니와 나중에 단골이라고 갖은 덕담이 다 있었다. 

열한째, 말명놀이 할때, 최장군이하 여러 신과 최서뱡의 조상들이 돌아 간다고 무당이 주어 섬기니 굿 끝이 가까워 온 것이다. 구경꾼들이 풀리기 시작 하여 사람이 많이 갔을 때, 마즈막거리 

열두째 뒷전놀이가 시작 되었다. 뒷전에는 원무당이 나오지 않고 다른 무당들이 나와 노는데 서울 혼인에 깍쟁이 오듯이 갖은 귀신이 다 걸립을 들어 왔고 지신청배, 선왕청배, 영신청배, 잠깐 잠깐 지나 가고 풍류 없이 춤추고 나서 귀신들이 치사하고 나서 하직 하는 말이라고 무당은 한동안 주어 지껄었다. 큰굿 열 두 거리가 인제 끝이 났다. (무당들이 전물을 내다가 세번 고실네 한 뒤에 저희의 차지를 제하여 놓고 구경꾼들에게 제면떡을 나누어 주었다)

이 열 두 거리라는 것도 경우에 따라서 변하며 어느 하나 고정된 것은 아님을 마음에 두면서 살펴 보자.

1. 부정거리; 부정한 신이나 잡귀를 가심(물리침)

2. 만명거리; 죽은 단골무당을 불러 냄(말명거리 라고도 함)

3. 가망거리; 몬주를 모셔 공수를 내림(감응거리 라고도 함)

4. 성주거리; 집터나 집에 관련 된 성주를 모심.

5. 산신거리; 마을신을 모심.

6. 제석거리; 불교계통의 신을 모심.

7. 조상거리; 신도의 조상신을 모심.

8. 호구거리; 수호신, 마마신을 모심.

9. 창부거리; 놀이신을 모심.10. 대감거리; 재물신을 모심.

11. 군웅거리; 장군신을 모심. 12. 뒷전거리; 온갓 잡신을 모심.

*오구굿에 대해 알아보자.

 경기도에서는 "진오귀 굿"전라도에서는 "싯김 굿", 제주도에서는 "시왕맞이", 경북지방에서는 "오구 굿", 함흥이나 평양에서는 "다리 굿"이라 하고 그밖에 진오기 굿, 지노귀 굿, 새남 굿, 귀양풀이, 왕맞이, 망북이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오구굿은 떠도는 죽은 영혼을 저승으로 안전하게 떠나 보내는 굿으로 한풀이의 굿이며 맞남의 장이다.

다음은 경기도 지방의 진오귀 굿 열 두 거리의 한 예 다.

1. 주당퇴산(周堂退散)거리.

2. 부정(不淨)거리.

3. 산마누라거리.

4. 별성(別星)거리.

5. 대감거리.

6. 영의(靈衣)거리.

7. 사자(使者)거리.

8. 말미거리.

9. 도장(道場)거리.

10. 혼전(魂篆)거리

11. 시왕군웅(十王群雄)거리.

12. 쥣전거리

4. 巫樂(무악); 巫樂에 관해서는 한국음악, 民俗樂(민속악)을 이아기 할때, 상세히 할 것이므로 여기서는 약하고 다음으로 미루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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