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꼭두각시 놀음의 연극적 공간과 "산받이", 김홍규,

 현재끼지 전승되고 잇는 유일한 민속 인형극인 꼭두각시 놀이(박첨지놀음, 덜미)의 기원, 놀이방법, 놀이의 인적구성, 인형, 소도구, 내용등에 관해서는 많은 연구가 있었다.그러나, 꼭두각시 놀음의 연극적 논리 해석의 검토를 기다리고 있는 점이 보인다. 이런 문제가 전연 없던 것은 아니라고 말 하면서, 꼭두각시 놀음이 인형극 특유의 제약속에서 어덯게 연극적 경험의 활력을 획득 할수 있었던가는 충분히 밝혀 지지 않았다고 논자는 말 한다. 이러한 문제의 결정적인 열쇄가 되는 인물이 "산받이" 라고 보고 그의 역활을 면밀히 검토 하므로서 꼭두각시 놀음의 연극적 원리를 밝히는 성과에 까지 이르러야 할것이라고 한다. 한예로 심우성(沈雨晟)씨가 말 하려고 하고 있는, 즉 꼭두각시 놀음에서 인형의 주조정자인 "대잡이"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산받이"라고 한 것에 주목 하여야 한다고 한다. 이러한 시사적 통찰을 수용하면서 "산받이"의 연극적기능과 그 효과를 보다 깊이 정밀하게 살펴 보아야 한다고 한다. 이러한 것들을 수용하면서 "산받이"의 모든것을 깊게 정밀하게 살펴 보자.

1). 산받이의 위치(요약),

  꼭두각시 놀음에서 산받이의 위치는 무대 앞에 비스듬 하게 놓여진 악사석 이다. 즉 관중석과 거이 분리 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대를 보고 앉아 놀이를 진행시킨다는 것이다. 이로인해 가능 해 지는 산받이의 특수한 성격을 양면적 소속이라 할 수 있겠다. 즉 산받이는 재담의 상대역 및 악사로서 놀이패의 구성요원이면서, 한편으로는 구경꾼들과 마찬가지로 무대밖에서 바라보는 구경꾼이라는것, 놀러 나온 마을 사람으로서 무대에 나오는 인형들과 대화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산받이는 이 두세계를 동시적으로 관계하면서 그들을 연결 한다는 것이다. 산받이의 자리는 이러한 곳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2). 산받이의 역활(요약),

  꼭두각시 놀음에서 산받이가 담당하는 역활은 연극적공간의 확장이라는 것이다. 잘 알려진 바와같이 꼭두각시 놀음의 무대는 평면적무대 이다. 공간이 다소의 입체성을 가능 하게는 하지만,,,, 꼭두각시의 무대는 근본적으로 평면성을 벗어날 수 없다. 평적인 무대에서 행연(行演)하는 인형들이 평면성을 다소 극복 해 주지만 턱 없이 부족하다. 그러나 산받이의 개입으로 무대는 입체화 되면서 놀이판에 생기를 불어 넣게 된다. 꼭두각시의 처음부분에 이점이 분명하게 들어난다.

박첨지; 어흠, 어흠, 아닌 밤중 가운데 사람이 많이 뫃였구나.

산받이; 아닌 밤중가운데 사람이 많건 적건 웬영감이 남의 놀음처에 난가히 떠드시오.

박첨지; 날더러 웬 영감이냐구?

산받이; 그려.

여기서 박첨지는 무대공간에 속해 있는 인간이지만 "아닌 밤중에 사람이 많이 뫃엿다고" 말 하므로서 놀이판 전체를 무대로 끓어 드리게 된다. 또한 산받이는 관객들과 구경하는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웬 영감이 남의 놀음 처에서" 떠드는가 물음으로서 무대 전체를 놀이판으로 만들어 버린다. 삼받이의 간혈적인 개입으로 무대면의 완전한 독립을 허용 하지 않고 관중석과의 유대관계를 지속적으로 재 확인 시킨다. 무대와 관중은 서로 간섭 할수 없다는 장벽이 존재하고, 관극이란 두꺼운 유리창 너머로 남의 삶을 은밀하게 엿보는 것이라는 근대사실주의 연극의 통념에 의하면, 꼭두각시 놀음의 이 특징은 불합리한 것으로 간주 된다. 그러나 사실주의 연극이 설정한 묵시적 전제가 어떤경우에나 유효한 규준이 될 수는 없다는 것에 동의 한다면, 산받이의 관여에 의해 이루어 지는 연극의 공간적 공간의 확장이  단지 유치하거나 비합리적인 특점이라고 만은 할수 없다. 오히려, 꾹두각시의 연극적 놀음의 연극적 조건을 생각 한다면, 산받이의 존재로 인해 가능 해 지는 극중현실의 일체화야말로 한정된 평면무대에 구체적인 양감과 질감을 부여하는 효과적 수단이라고 생각 한다고 논자 김홍규는 말 한다.

3). 그중 현실전개의 계기 부여(요약),

   산받이는 이렇게 연극적 공간의 확장에 기여 하면서, 한편 한정된 무대에서 제약에도 불구하고 극중 현실이 그 분명한 모습을 드러 내고 효과적으로 진행 할수 있도록 개임 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임무는 극중 현장의 장면, 의미에 대한 질문자의 역활 이라는 것이다. 많은 예를 다 들수 없어 두어개만 골라 실어 보겠다고 논자는 말 한다. 

박첨지;  날더러 웬 영간이냐구 ?

산받이; 그려.

박첨지; 허허허 내가 웬영감이 아니라 내가 살기는 저 운녁에 산다.

산받이; 저 운녁에 산다는 걸 보니 한양근처에 산다는 보네.

박첨지; 아따, 그사람 알기는 오뉴월 똥파리 처럼 무던히 아는 척 하는 군,

산받이; 암, 알만 하지, 한양으로 일러도 8문안에 억만가구가 다 영감네 집이란 말이여. 

박첨지; 아하 여보게, 한양으로 일러도 8 문안에 억만가구가 다 내집 일 일이 있겠는가, 

          내 사는 곳을 일러 줄 터이니 들어 보게, 아랫벽동 웃벽동 다 제쳐놓고 가운데             벽동 사는 박한량 박주사라면 세상에 모르는 사람 빼 놓고는 다 안다.

피조리; 우이여, 우이여, 

산받이; 이건 누구려,

피조리; 내가 미생이여, 

산받이; 아, 기생이면 기생이지 미생은 뭐여

피조리; 참, 기생이여

산받이; 너 그간 어디 갔다 왔니 ?

피조리; 나, 거울갔다 왔어요, 

산받이; 서울이면 서울이지 거울이 뭐여, 그래 뭣하러 갔었냐 ?

피조리; 권반에 갔다 왔어요

산받이; 그럼 너 소리 잘 하겠다. 한번 해 봐라.

피조리; 내가 소리하면 당신 똥구녁 쳐,

산받이; 허허 미친단 말이지, 그럼 한번 해 봐라

피조리; 그럼 할께요(唱),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여기서 산받이가 하는것은, 극중인물의 정체가 들어 날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는 일이다. 이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물의 정체가 밝혀 진 뒤에도 변화되어 가는 장면에 대화자로서의 산받이는 필요하게 된다. 이뿐만 아니라 진행의 수동적, 소극적 계기 만을 제공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극중 현실을 이끌어 간다는 것이다.

박첨지; 뭐,뭐, 그 망할자식이 또 나왔나 보네.

산받이; 그게 누구여 ?

박첨지; 우리 사촌조카여.

산받이; 저런 망할 영감, 4촌동생이면 동생이지, 4촌조카가 어디 있어.

박첨지; 아, 4촌조카는 없나, 아, 누님의 아들이 누구여

산받이; 누님의 아들이면 생질조카지 누구여, 

박첨지; 생질조카, 난 4촌조카라구 허허허 그놈 들어가서 좀 때려 줘야갰네(잠시들어갔

              다 나온다)

박첨지; 여보게, 아 그놈을 내 들어가서 종아리를 때렸더니 아이고, 할아버지 다시 안           그런대요, 하고 빌지 않어,

산받이; 아, 저런 망할 영감 생질조카는 뭐고 할아버지는 뭐여,

산받이; 야, 진동아!

홍동지; (무대뒤에서) 밥 먹는다. 

산받이; 밥이고 뭐고 홍재났다, 빨리 나오너라.

홍동지; (뒤통수부터 나온다) 외 그려.

산받이; 이놈아 꺼꾸로 나왔다. 

홍동지; (돌아서며)어쩐지 앞이 캄캄하다라.

위의 극의 대화에서 일상적 기준으로 부터의 어긋남을 지적하며, 희극적 불일치의 의미를 분명하게 하는 것이 산받이의 몫이다. 산받이의 개입없이는 위의 부분들이 지닌 극적의미가 매우 불투명 한 것으로 된다. 희극적 발견의 계기를 만들어 주는 자로서의 산받이는 꾹두각시 놀음의 민중연예적 기반을 잘 보여 주게 되는 것이다.

4). 극중현실과 생활현실의 일체성 확보,

   이상에서 논한 역활을 토대로 하여, 이에서 한거름 더 나아가 산받이는 극중현실을 생활현실의 연장으로 받아 드리고 이것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받아 드리면서 그것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대응 한다. 그는 연극의 진행을 돕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무대에서 전개되는 사태를 논평 하면서 희극적 불일치 또는 일탈행위에 대립하는 일반적 규칙을 제시 한다.

박첨지; 나는 한강수 거슬러 떠 먹는 박한량 박영감으로 남의 애를 욕 할때 유식하게 했            겠지 무식하게 했겠나,

산받이; 그래 어찌 어찌 나무랬나.

박첨지; 애,애, 이놈들아, 네 애비 똥구멍하고 네 에미 똥구멍하고 딱 붙이면 양장구 똥              집이 될 놈아, 그랫지. 허허허,

산받이; 거참 점잖게 나무랬네. 

          (꼭두각시가 울면서 가더라고 산받이가 알려주니)

박첨지; 아이구 아이구 아이구

산받이; 여보 영감, 내쫒을 때는 언제고 찾을 때는 언제여, 울기는 외울어.

박첨지; 아 내가 울고 싶어 우는가, 속이 시원해서 우네.

산받이; 에이, 망할영감.

박첨지 손자; 우여 우여

산받이;        넌 누구여 ?

박첨지손자; 내가 박첨지 손자다. 

산받이; 외 그리 오동통하게 생겼냐?

박첨지손자; 내가 나이 많아서 그렇다.

산받이; 너 나이가 몇인데 ?

박첨지손자; 내 나이가 여든 두살.

산받이; 그럼 니 할애비는 ?

박첨지손자; 우리 할아버지는 열 두 살, 우리 아벼지는 일곱 살우리어머니는 두 살.

산받이; 이 망할 자식.

박첨지손자; 우여, 우이여, 애개개개.(이시미에게 잡아 먹힌다)

점잖은 대사가 해학적인 어조로 덮여 있기는 하나 극중인물에 대한 논평의 의미로 뜬다. 산받이의 논평에 의해 무대안의 사건들은 별새계의 것이 아니라 관중들의 생활과 붙어있는 , 그리고 생활규칙의 가치 규범에 따라 평가 받는 동질적 경험이 된다. 셋째 인용부분에서 박첨지손자가 드디어 이미시에게 잡혀 먹힌 다는 것은 이와같은 논평의 연극적 표현이라고 할수 있겠다. 연극, 특히 희극 내지 소극(笑劇)은 공동체적 일반성으로 부터 어긋 난 행위에 대한 상상적 재판의 성격을 갖이게 되는데, 산받이는 말 하자면 이 연극의 재판에서 재판관이고 관중은 배심원이라고 할 만 하다. 평안감사 마당에서는 산받이가 직접 논평자가 되지 않고 다음과 같이 우회적인 방법을 통해 현싱의 비판적 이해를 끓어 내는 예로 되어 있다.

상주; 벌거벗은 놈은대감 상여에 얼씬도 말어라. 

홍동지; 다 틀렸다 다틀렸어, 벌거벗은 놈은 대감상여에 얼씬도 말라네.

산받이; 얘얘 그럼 좋은 수가 있다.

홍동지; 뭐여 ?

산받이; 내 시키는대로 해서, 상제님이나,상도꾼이나 모두 사타굼치 그건 떼어 아랫목에            묻고 왔느냐고 물어라.

홍동지; 야야 경칠려고.

산받이; 괸찮어.

평안감사가 죽어 상여를 내 가는 장면이다. 갈등의 두 주력은 홍동지와 상주다. 전자는 일체의 형식적 꾸밈을 버리고 벌거벗은 채 욕망을 긍정하며 상스럽게 살아가는 발랄하고 힘이 넘치는 서민적 생산력의 전형이고, 부자는 위선과 형식적 의례를 존중하며 죽은 평안감사의 장례를 엄숙하게 치르는 것이 유일한 목적 인 지배층 이다. 홍동지는 상여품 팔라는 말에 먹을것 타령을 하면서 "개장국"도 있느냐고 덤벼 들므로서 지배층의 엄숙함을 욕 보인다. 그러나 상주가 "대감상이다, 발가벗은 놈은 얼씬도 말아" 라고 호령 하자 난관에 부디친다. 여기에 끼어 드는 것이 산받이 이다. 산받이는 "상제님이나 상두꾼이나 모두 그건 떼어 아랫목에 묻고 왔느냐고" 물어 보라고 하므로서 홍동지가 난관을 해결하고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논거를 가르켜 준다. 아무리 외견상으로 근엄을 자처 한다 할찌라도 누구나 갖인 소박한 자연성은 부정 될수 없지 않느냐는 서민적 발상이 그 요지 이다. 결국 상주가 이 물음에 항복 하므로서 홍동지는 희극적 갈등에서 이기게 되는데, 이는 서민적 의식의 대변자로서 산받이가 행하는 비판적 개입에 힘 입은 것이 되었다. 놀이판에 참가한 관중들은 이러한 일련의 환각작용을 통해 극중현실을 신기한 장난만이 아닌 생활경험의 현장 및 상징적 축약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들은 스스로의 일상 경험과 체험적 가치의식이 무대공간에 직접 교섭하면서 연극적 갈등의 동력으로 되는 데서 기쁨을 느낀다. 또한 둘 사이에 확대되어 있는 연속성으로 인해 극중현실의 경험에 대한 비판적이해는 자연스럽게 그들 자신이 실제로 살아가는 생활현실을 비판적으로 재인식하고 지양하도록 하는 발견의 힘이 될수있다. 예술적 경험과 생활경험 사이의 이와같은 건전한 통합을 달성하는데 기여하는 산받이의 존재를 연극사적 발전이 덜 이루진 징표라고 만 생각 한다면 그것은 커다란 착각이라고 논자는 말 하고 있다.

4). 가면극과 악사와 산받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먼저 글에서 이야기 했음으로 여기서는 약하고, 가면극 탈춤을 이야기 하면서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려고 여기서는 미루어 두기로 하겠다.

5) 결론(요약).

   광범한 현장관찰과 다수의 채록본을 포함하지 못한 것이기에, 위에서 논한 바가 꼭두각시 놀음과 산받이를 이해하는데 충분한 것이라고는 할수 없다면서, 전승의 계통,연희자의 개성과 능력, 놀이판의 상황등의 요인에 따라서 산받이 역활은 다소 가감 될수 있을 것이라 생각 된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점을 인정하더라도 모든 꼭두각시 놀음에서 산받이가 있어야 하고 그는 우리가 검토한 것과 같은 여러가지 개입을 통해 연극적 경험의 활력을 촉진 한다는 일반성은 부정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의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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