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탈춤;

   탈춤은 한국 각 지방에서 전 해 지는, 탈을 쓰고 벌이는 전통적인 가면극을 말 한다.

1). 특징, 

   高句麗의 巫樂(무악), 百濟의 器樂(기악), 新羅의 處容舞(처용무)와 五技(오기) 등 삼국시대  이래로 대륙 전래의 산악백희(散樂百戱)와 高麗의 산대잡극(山臺雜劇) 등과 朝鮮朝前代(조선조전대) 때 까지의 각종가면희(仮面戱)가 선행예능(先行藝能)으로서 참여하여 朝鮮후기 산대도감극(山臺都監劇)계통의 놀이로서 현전(現傳) 하기에 이르렀다. 이 산대도감극 계통의 놀이로서 현전 하는 것에는 , 중부지방의 양주 별산대놀이 와 송파 산대놀이, 서북지방의 봉산탈춤, 강령 탈춤, 은율 탈춤, 영남지방의 통영 오광대 와 고성 오광대 그리고 수영 야유회, 동래 야유회가 있다. 이밖에 하회 별신굿 탈놀이 와 북청 사자놀음은 계통은 달리 하는 탈놀이 이다. 한국 가면극의 연출 형태는 음악반주에 춤이 주가 되며, 거기에 창(노래)이 따르는 가무적 부분과 사설, 즉 대사가 따르는 연극적 부분의 두 부분으로 구성 되어 있다. 연기자 다수가 또는 일부가 가면을 써서 등장인물을 나타내며, 극적장면을 연출 하는 것이 가면극이라면, 가면은 가면극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 이다. 한국가면극에 쓰이는 가면은 위에 든 각지방의 가면극에 따라 제각기 다른 가면을 사용하며 그 수가 풍부하다. 가면 제작의 쓰이는 재료는, 나무와 종이, 그리고 바가지가 제일 많이 사용 된다. 가면의 색(色)은 백, 주, 흑, 청, 황 등 오방색(五方色)이 주가 된다. 가면 뒷면에 탈보자기 가 달려 있어서 이것으로 머리에 동여 매어 얼굴 전면을 덮게 되어 있고, 후두부를 가리게 된다. 이 가면은 대체로 재래의 남자 평민들에게 만 탈을 씨웠다. 반주음악에 쓰이는 악기는 피리, 젓대, 장고, 북, 꽹가리, 해금 등 육자배기(六角) 악기이며, 주 곡조는 염불, 타령, 굿거리 등의 민속 무용의 반주음악과 같은 것이다. 한국 가면극은 원래 야외극으로 상연 되어 왔고, 상연시간에도 일정한 제한이 없어, 보통 저녁에 시작하면 모닥불을 피워 놓고 새벽까지 계속 했다. 상연시기는 각 지방에 따라 다르다. 음력 정월 대보름과 사월 초파(8)일, 5월 단오, 8월 추석 등의 명절과그밖 나라의 행사 때 하는 놀이로서 그리고 가믐때, 기우제 행사로서도 상연 되었다. 현존하는 이들 가면극은, 가면에 대한 고사와 의식무(상좌춤'上座舞')를 시작으로 시작되며 파계승, 몰락한 양반, 상민, 무당, 사당(寺黨)거사, 하인 등의 등장을 통하여, 1, 파계승에 대한 풍자, 2, 상전인 양반에 대한 모욕, 남녀(부부)의 갈등, 4, 서민생활의 곤궁성 등을 보여 주며 이 주제들을 몇가지의 마당으로(科場) 나누어 일종의 옵니버스 스타일(Omnibus style(다목적 적 식으로)로 묶은 것이다. 이것은 어느나라의 민속극에서도 공통으로 볼 수 있는 것으로, 특권계급과 형식도덕에 대한 일종의 반항과 비판을 구체적으로 연출하는 민중극 이다. 이같은 서민 문학성은 임진, 병자 이후 일어난 시민문화의 주류를 이룬 사조로서 낡은 인간관계 즉 양반의 특권이나 승려들의 종교적 권위 마저 웃어 넘가던 시대적 분위기의 반영이기도 하다.

2). 기원,(편집)

   가면극에 대한 사적 연구는 다른 쟝느의 경우 보다 활발 하게 이루어 져 왔으며, 그 논의의 초점은 가면극의 기원을 어디에 두느냐로 압축 되었는데, 농경이식설, 기악설, 산대희설 등이 가면극의 기원을 설명 하는 암소리 베베베배베배베배 벱배ㅔ베베베베법베배 배베베배= 백제사람 미마지(味摩之)가 中國南朝吳(중국난조오)에서 배워 日本에 전 했다는 기악(技樂)이 바로 가면극의 기원이라는 설 이다. 13세기에 만들어진 日本문헌 교훈초(敎訓抄)에 전하는 기악은 묵극(默劇,무언극)이기는 하나, 그 내용이 오늘날의 양주 산대놀이 나 봉산탈춤과 흡사 함으로 기악이 가면극으로 전승 되었음을 알수 있다는 논지 이다. 대희(臺戱)는 산 처럼 높은 무대를 만들어 오색 비단과 인물 , 새, 짐승, 수례 등의 가작물로서 장식 하였고, 그 위에서 가무와 규식지희(規式之戱) 및 소학지희(笑謔之戱)를 하는 놀이 였다. 일찌기 新羅에서 시작되어 高麗를 거쳐 朝鮮에 와서는 국가적인 행사로서 계속되어 오다가 仁祖때 일단 중단 되고, 英祖이후에는 없어 졌다. 국가희의 산대희는 없어 졌으나 그 연희가 반인(伴人), 편놈들이 민간에서의 산대놀이 즉 가면극을 시작 했다. 따라서 가면극의 연기는 규식지희의 연장이고, 대사는 소학지희가 발전 한 것이란 논지이다.

3). 역사.(편집).

  (1). 삼국시대의 가면극,(편집)

      한국 가면극의 역사는 기원 9세기 말옆으로 거슬러 올라가, 新羅사람  崔致原(최치원)의 향악잡영(鄕樂雜詠) 五首(오수)에 나타나는 五技(오기), 즉 월전(月轉), 대면(對面), 금환(金丸), 속독(謖禿), 산예(橵猊)에서 확실히 가면을 사용 한 흔적을 엿볼수 있다. 다만 유감인것은 그 시(詩)가 너무나 잛고 간단하여 내용이 자세 치 않다는 점이다. 그러나 가면극으로서는 이것이 한국에 있어서는 최초의 기록인 셈이다. 新羅시대에는 이것 말고 처용무(處容舞)라는 가면놀음이 있었다 고는 하나, 이에대한 정확한 유물은 없다. 다만, "동경잡기(東京雜記) "풍속조"의 가사(歌辭)에서 검무가 가면극이라는 시사를 얻을 수 있는 바, 이 가면 검무는 중국북제(中國北齊) 난능왕이 고사를 놀음으로 만든 가면희 와 어린 관창의 이야기를 춤을 통해 놀음으로 만든 것이라 한다. 그리고 같은 책에, 처용무 역시 가면을 쓰고 춤을 춘다는 것을 말 하였다. 그러나 "문헌비고" "황창랑무조" 를 보면, 이 두 놀음이 발생한 新羅 그 당시에도 과연 가면을 사용 했을까에 대해서는 의문이 간다. 다만 상술한 문헌을 통해서 뒷날 가면을 사용 했다는 것만은 명백 하다고 주장 할 수는 있겠다. 이 검무는 (칼춤은) 지금까지도 전승 되어 오거니와, 오늘날 보는 검무는 가면을 쓰지 안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는 후세에 와서 이 춤이 남성의 놀음에서 여성의 놀음으로 옮겨 간 뒤로 부터 라고 생각 된다. 아무튼, 이 검무는 新羅가 통일의 위업을 성취 하려 할때 화랑도 정신을 검무로서 표현하고, 또 이를 고취하려 했던 것이라고 생각 된다. 처용무는 高麗, 朝鮮을 거쳐 오늘날 까지 가면을 쓰고 춤추는 것을 보거니와 "高麗史"高宗23년 조(條)와 신우조(申禑條)를 통 해 高宗23년(1236)에 연희 하였다는 것이 문헌상 가장 오래 된 것이니까, 그 이전에도 있었을 것이라는 것을 엿 볼수 있겠다. 이 가면 처용무는 朝鮮에 와서도 궁중울 중심으로 연희 되어 왔으니  그 연희에 대해서는 "용재총화'등에 산견(散見) 된다. 아무튼 처용무는 新羅 말기에 발생한 처용전설을 토대로 한 고대사회의 주술적 무용의 하나로 보아 틀림 없다.

(3). 朝鮮시대의 산대나례(山臺儺禮).(편집)

   高麗시대의 나래와 산대잡희는 朝鮮시대에도 그대로 계승되어 仁祖 때 공의로서 페지 될때 까지 행해 졋다. 朝鮮조에서는 산대도감(儺禮都監나례도감)이 설치 되어 여러가지 놀음을 주선 하였으며 조정의 여러의식이나 외국사신의 영접에도 이와같은 놀음이 사용 되었다. 그러나 仁祖12년, 산대잡희, 나례가 혁파되자, 이러한 놀음에 종사 해 오던 연희자들은 그들의 생계를 위하여 재출발을 해야만 했다. 이리하여 그들은 그들 자신들의 발의에 의하여민간 관람자를 위하여 새로운 국면을 개척 해 나아 갔으며, 이로부터 단순한 가면놀음에서 하나의 연극으로 점차 발전 해 갔다. 여기서 산대잡희가 아닌 산대가면극으로서의 산대놀음이 연희 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산대잡희 및 나례가 공의로서 폐지 된 이후에 일이 되겠다. 당시 나례도감에 예속되어 있던 연희자들은 하층민으로서, 그들은 궁중에서 가면을 쓰고 나례행사를 하던 난자들이 었다. 물론 이들은 나례행사외에도 산대잡희 때에도 연희를 하였다. 그들은 그들 끼리의 도중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공의로서 궁중의 나례(전염병을 쫓는 굿 행사) 및 산대잡희가 페지되자, 생계를 이어 가기 위해 그들의 기본 재주를 활용할 수 밖에 없었다. 공의가 페지된 뒤에도 가끔씩 궁중에 불려 들어가 연희를 하였으나, 그들의 생활비는 국가에서 직접 주지는 않았으나 그들에게 계방(契房)의 도인(都印)을 주어서 생계를 보조 해 주었다. 도인이란, 관가에서 발행하는 증명서의 일종으로 민간인에게서 기부금을 받을수 있는 허가증 같은 것인데, 봄철에는 매미인(蟬印), 가을에는 호랑이인(虎印)이 찍혔다. 그들은 이것을 갖이고 년 2회 나루터나, 장터나 절 등지에서 놀이를 하며 돈과 곡식을 받아 생계를 꾸려 나갔다. 뿐만 아니라, 영업하는 상인들과 계약을 맺어 특별한 장소에서 공연을 하면서 사람을 모아 그들의 영업을  돕기도 하면서 돈과 공연비를 챙겻다. 오늘의 이벤트 행사로 보면 되겠다. 이런것이 계기가 되어 이들은 두례패라는 이름으로 무당패와 사당패와 같은 패를 형성하게 되고 이들은 중인과 이속의 사회성을 대표하게도 된다. 

(4). 산대가면극의 전파.(편집) 

   이들 연희자들의 거주지는 성밖이 었으며, 서울 남대문 밖의 큰 고개(大峴里)및 서빙고. 서대문 밖의 녹번리 그리고 애오개 등지였고 아현리에 살고 있는 자들이 만았음으로 이른바 아현산대(阿峴山臺)라고도 하였다. 이 아현리에 살고 있었던 아현산대들은 지위가 가장 낮은 데다가 또 경제적으로 혜택을 입지 못 했기 때문에 70여년 뒤 흐지부지 해산되고 말았다. 그런데 서울에서 70리쯤 떨어져 있는 "양주산대"는 지금으로 부터 100년전 서울성밖에 있던 아현산대가 흥행으로 양주에 갔을 때, 그곳 관아의 하층배들이 보고서 이것을 본 받아 배운 것으로 이들은 같은 계통에 속 한다. 그리하여 아현산대의 아류인이 양주산대를 "별산대(別山臺)"라고 부르기도 한다. 양주산대는 지방공연을 갖기도 하였는데, 대대적인 흥행으로 1929년 조선 박람회 때, 서울 동대문 밖 붕어우물에서의 공연 이 었다.이들 산대가면극은 양주이외의 지방에서도 연희 되어 왔는데, 구파발, 녹번리, 노량진, 퇴계원, 송파 등지 였다. 이중 송파산대는 50년전 양주산대가 송파에 와서 노는것을 보고 배워서 한 것이다. 그 외의 산대놀이는 각지방에 거주하는 연희자들이 저들 나름의 놀이를 하면서 놀이가 전파 되었다. 산대가면극은 아현산대가 연극으로 발전 하면서 각 지방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는데, 그 때 이 가면극이 여러 지방으로 전래 지면서 다른 류형의 가면극이 형성 된 것으로 본다. 즉 해서(海西)쪽의 봉산, 해주, 강령, 황주, 서흥, 기린 등지에 퍼져 해서가면극을 형성, 동해안쪽으로, 강능, 영양, 안동 등지의 산대를 "서낭신제(城惶神祭)가면극, 남해지방의 낙동강연안쪽의 초계, 신반, 진주, 마산, 김해, 통영, 고성, 거제, 동래, 분진 등지로 퍼진 오광대 및 야유가면극이 되었다.

5). 종류. (편집)

   한국민속극의 큰 갈개중 하나인 가면극은 高句麗의 "가면무", 百제의"기악", 新羅의 "오기"와 "검무" , "처용무", 삼국시대이래 중국에서 건너 온 "산악백희" 등 지배계급이 주관 했던 가면희등이 토착적인 "탈굿" "탈놀이" 등과 섞이면서 선행예능 역활을 하면서 형성 되었는데, 그 주류를 이루는 것은 "산대놀이" 로서, 애오개, 노량진, 튀계원 , 녹번, 구파발, 송파등지에 흩어진 "산대패" 에 의해 형성 되었다.이렇게 형성된 가면극은 그 내용이나 형식면으로 보아 선행예능이 되어준 "가면희"와 달리 서민 취양화 된 것이었는데, 이를 "본산대'라 부른다. 처음 서울 근교에서 시작된 "산대놀이"는 각지방으로 전파 되었고, 그 지방의 독특한 스타일로 발전 하여 경기지방의 "양주별산대놀이" 해서지방의 봉산,강령, 해주의 탈춤, 경남지방의 '동래야유" "수영야유", 일정한 고장이 없이 유랑하며 연희하던 "남사당 덧보기", 다소 게통은 다르나 함경도지방의 "북청사자놀이" 경북지방의 "하회별신굿놀이", 강원지방의 "강능관노탈놀이" 등으로 갈라 졌다. 

6). 한국 가면극 내용의 공통점.(편집)

   한국의 민속 가면극들은 원래 야외극으로 무대다운 무대없이 비탈진 언덕 아래 평지나 넓은 들판 같은데서 상연 되었으며, 민속연희의 일반 특성으로 연출시간에는 제한 없이 보통 밤 10시경에 시작 하면 새벽까지 모닥불을 피워놓고 계속 되었으며, 동틀무렵 끝이 나는 것이 상례 였다. 시기는 각지방에 따라 다른데, 음력정초, 상원(上元), 사월초파일, 오월단오, 팔월추석명절과 그밖 경사때나, 폭천의 기우제 같은 때에도 수시로 공연 되었다. 현존하는 가면무극의 공통 내용은 같은 시기의 朝鮮의 서민문화가 그러하듯 파계승과 몰락한 양반, 무당, 사당패, 거사와 기타서민들의 등장을 통하여, 권선징악의 테두리에서 호색과 현실 폭로와 풍자 웃음 등을 보여 주며, 그 주제는 크게 이것을 세분 하면 , ㄱ) 벽사의 의식무(舞)와 무제(巫祭), ㄴ) 파계승에 대한 풍자, ㄷ) 양반에 대한 모욕, ㄹ) 남녀(부부처첩)의 갈등 ㅁ) 서민생활의 곤궁상 등을 나타 낸것 들이다.이 주제들은 몇개의 과장(마당)으로 나뉘어 소위 Omnibus style로 한 테두리 속에 묶은 것임으로 서양 근대극 처럼 하나의 시종한 공통점은 그 경영적인 면으로, 연희에 소요되는 비용은 지방유지나 상인들의 기부로 충당되었고, 대개의 경우 연희패가 받는 전곡 말고 연희자들은 무보수 였으며, 지방에 초청을 받아 가면 응분의 전곡(錢穀)이나 주식대접을 받는 정도 였다.

7) 무용과 음악.

  민속극의 범주안에 드는 가면극, 인형극, 판소리 악극 중에서 가면극부분이 한국 연희의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탈춤" 부분이 가면극이 성격을 규정 지워 줄 만큼

강하게 유형화 되어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민속극을 연구분석함에 있어서는 무용과 음악의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며 그것은 연극학적인 해석에 큰 주축이 된다. 더우기 민속극에서는 춤이 하나의 육체적 언어 표현으로 대사극을 가능 케 하고, 내용을 풍부하게 하여 민중의지를 유형화 한 춤 언어들은 자연히 의지를 담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대사(재담)가 구전되어 오는 도중에 없어졋거나 그 초점을 상실한 점은 춤이 보충, 환기 시켜 주며, "춤대사"가 하나의 민중체질로서 잠재 되어 온 하나의 강력한 요소이기 때문 이다. 민속 인형극에서 "춤사위"라 함은 한사위, 두사위, 겹사위등 수자의 한단위를 표시하는 의미를 갖인 춤의 종류로 해석하여 춤가락이라고 할수 있으며, 세(勢)라는 동작을 뜻 하기도 한다. 전국에 분포된 산대탈춤의 유형을 보면 다음고 같다.

(1) 북방계,

   ㄱ), 북청을 위시한 함경도의 사자춤과 그와 함께 추는 민속무용으로서 "사영춤".

    ㄴ), 봉산을 위시한 해서내륙지방과 해주 강령을 위시한 해서지방의 "사위춤".

(2) 중부계.

    ㄱ), 서울 변곽지역, 양주, 송파, 구파발등을 위시한 "산대깨끼춤".

    ㄴ), 안성을 위주로 한 중부이남, 남가당게의 "덧보기춤".

(3) 남방계,

    ㄱ), 동래, 수영을 위시한 낙동강우편지역의야유놀이 "덧보기춤".

    ㄴ), 통영, 고성을 위시한 낙동강좌편지역의 오광대"덧보기춤".

    ㄷ), 전라도지역의 매구굿노리, 풍장굿노리에 나타나는 "탈광대춤".

그 밖의 강능 단오제에서 행하는 관노놀이 인 탈놀음은 경상도와 경기도의 영향을 받은것 같으나 자세하지 않으며, 전라도는 탈광대놀음이 가면무에 끝나고 있고, 평안도지역은 서도소리에 맞추어 소리춤이 있으나 탈춤과는 관계가 없다. 

8). 공연방식,(편집)

   가면극은 가장한 배우가 첨예한 갈등으로 된 집약적 행위를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우하여 여러가지 수법을 사용하며, 이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대화와 몸짖을 하고, 또 다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공연되는 민속극의 하나 이다. 가면극은 철저한 민중적인 민속극으로 양반은 가면극의 공연자가 될수 없으며 관중으로도 참여하는 경우가 거이 없다. 양반동족부락에서 공연되는 가면극이든, 군읍소재지에서 공연 되는 가면극이든, 뿐만아니라 민중의 생각과 주장을 강력하게 나타 내어 양반을 공격 한다. 연극은 몸을 움직여 해 내야 하며, 공연자가 작중 인물로 가장하고 전환되어야 만 성립 될수 있다. 지나치게 몸을 움직이는 것이나 타인으로서의 가장적인 전환은 양반의 점잖음과 체면을 유지 하자는 욕구와는 크게 어긋 난다. 그러나 민중은 언제나 몸을 움직여야 살아 가며, 가장적인 전환을 능숙하게 할수 있어야만 양반의 억압에 맛서서 자기의 주장을 관철하고 결과적인 승리를 얻을 수 있다. 양반이 연극을 좋와하지 않고, 민중의 연극을 자기예술로 발전시키는 것은 당연하다. 가면극의 공연방식은 서구적인 근대극과는 다른 독자적 원리에 입각하여 이루어 져 있으며 그 원리는 가면극이 야외 민속극이라는 공연 조건을 최대한 이용한 것이기도 하면서, 지닌 미의식을 효과적으로 실현 한 것이다.

*악사와 반주는 따로 장을 만들어 논 해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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