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민속예술, 한국국악, 그 2.

2023.02.03 13:07

김일하 조회 수:7

4). 삼국시대.

  (1). 高句麗(고구려);

     高句麗의 가요로 지금까지 전해 오는 것은, 유리왕의 황조가(黃鳥歌)이다. 高句麗의 국악사는 크게 세단계로 구분 한다. 

제 1 기는, 외래음악이 들어오기 이전의 시기이며, 이때 만들어 진것들이다. 이때의 음악은 거문고와 같은 향토악기로 대표 한다.

제2기는, 高句麗가 中國의 後魏(후위)와 교류하기 시작한 4세기부터 6세기 중엽까지로 구분 한다. 이 시기에는 공후(空篌) 와 같은 서역의 악기가 들어온 시기 이다.

제 3 기는, 6세기 후반부터 高句麗가 멸망 할때까지로 구분 한다. 이때의 高句麗의 음악은 매우 융성하여, 唐(당)의 九部伎(구부기) 등에도 포함되었다. 高句麗 음악에는 西域(서역)음악인 구현악(龜絃樂)이 들어와 많은 악기가 쓰인 시기 이다. 공후, 비파, 오현, 생(笙), 소(蕭), 피리, 요고(腰鼓) 등 많은 악기가 사용 되며 당시 百濟와 新羅음악에 비해 매우 발전된 형태였다.

5). 거문고, 

   "三國史記(삼국사기)에 의하면 高句麗의 왕산악(王山岳)이 거문고 또는 현금(絃琴)을 만들었는데, 그 악기는 晉人(진인)이 아니고 西晉도 아닌 東晉(동진, 317~420)사람이 보내 온 中國의 琴(금)을 개조 한 것으로 보인다. 현행 거문고와 같은 악기가 통구(通溝)에 있는 高句麗의 무용총의 벽화에 그려져 있는데, 다만 6현 대신 4현을 갖인 점에서 현행거문고와 다를 뿐이다. 이 高句麗 고분에 그려진 악기는 거문고의 원형이고, 현행 거문고는 그 변형으로 보인다.

6). 日本후기에 나타 난 악기,

   "日本後記(일본후기)" 에 의하면 高句麗 음악은 악사가 4명인데, 횡적(橫笛), 공후, 막목(莫目, 일종의 관악기),과 無箏師(무쟁사)였다. 즉 高句麗의 연형악(宴亨樂)은 횡적, 거문고 , 막목 과 같은 악기에 마추어 노래하고, 그에따라 춤을 추는 것이다. 百濟樂(백제악)도 高句麗樂과 같이 횡적, 거문고, 공후, 막목으로 춤을 반주 하였다. 百濟가 高句麗의 거문고를 차용 한것이 주목 된다.

7). 西域악기의 전래,

   불교가 高句麗에 전래 된 것은 서기 372년에 북부 中國에서 였고, 百濟는 그 보다 늦어서 서기 384년에 남부 中國에서 들어 왔던 것 처럼, 외국 악기도 高句麗와 百濟에 中國 남북조 말기에 각각 달리 들어온것 같다. 즉 隨書(수서,622년)의 동이전(東夷傳)에 의하면 高句麗樂, 五絃琴, 箏(쟁), 피리, 橫吹(횡취), 蕭(소) , 鼓(고) 를 섰고, 百濟樂은 鼓, 角, 공후, 箏, 우, 지, 笛을 사용 하였다. 그런데 高句麗樂에 채용된 五絃琴과 피리는 서역계의 악기로서 中國 북조에서 사용됬던 것이며, 百濟樂에서 채용되었던 공후와 지, 특히 지는 남조의 청악(淸樂)에서만 사용되었던 것이다.이와같이 高句麗는 북방 中國악기를 수입 채용함으로서 풍부 해 져서 隨 궁중에서 七部伎, 그후 九部伎에 열(列)하였고 唐의 궁중에서도 十部伎 속에 들었다.

(2). 百濟(백제),

   지금까지 전해 오는 百濟 가요로는 정읍사(井邑詞)가 있다. 현재 연주되고 있는 "井邑詞" 와의 관계는 명확 치가 않다 百濟 음악의 자료는 高句麗 고분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高句麗樂 벽화같은 것이 없고 기록도 영세하다. 고장왕(古薔王, 원년, 238)에 祭天地用鼓吹(제천지용고취)라 하여 고취악이 쓰여졌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것이 帶方(대방)에서 사용된 中國게 고취인지는 알 길이 없다. 日本後記에 의하면 百濟樂도 高句麗樂과 같이 횡적, 공후, 막목으로 춤을 반주 하였다. 百濟樂이 高句麗의 거문고를 사용한것이 주목되는데 이점은 百濟樂이 高句麗樂과 같고 新羅와 다른 것임을 알수 있다. 百濟樂은 5~6세기에 中國 南宋(남송)과 北魏(북위)에 소개 되었고 또 日本書記에 의하면 百濟 악사들이 교대로 일본으로 와서 음악을 전습시켰다고 하는데 문헌에 보이는 악인 은 施德(시덕), 三斤(삼근), 李德(이덕), 己麻次 (기마차), 進奴(진노), 對德(대덕), 進施(진시) 등 이중 4인은 횡적, 공후, 막목, 무(舞)를 했던것으로 보인다. 후기의 백제에는 남조악의 영향이 보인다. 中國문헌 "隨書" 東夷傳에 鼓, 角, 空篌(공후), 箏(쟁), 舞, 지, 笛 과 같은 악기를 쓴 기록이 보인다. 이러한 악기들은 隨의 九部伎에 비교하면, 강남(江南)의 淸樂- 淸商伎(청상기)에서 쓰이는 악기편성과 비슷하다. 百濟 사람 味摩之는 中國남부 吳 나라에서 伎樂을 배워 日本에 전했다고 한다. 

(3). 新羅(신라),

    통일 이전의 新羅樂은 가야금으로 대표 될수 있다. 가야금은 진흥왕(眞興王 때에 伽倻(가야)의 우륵(于勒)이 新羅에 전했다고 한다. 이시기의 음악으로는 "三國史記"에 이름 만 전하는 가야금 12곡이 있다. 眞興王 13년에 계고, 만지, 만덕 이 우륵에게서 각기 가야금, 노래, 춤을 배웠다고 했다. 우륵이 가얏고를 新羅에 자져오기 전 奈解王(내해왕, 196~229)때, 물계자(勿稽子)가 鼓를 쳤고 慈悲王(자비왕, 458~479)때, 白結先生(백결선생)이 鼓로 방아소리를 내었다는 기록이 있는 만큼 新羅樂은 鼓(가야금)가 대표적인 악기 였다. 三國史記에 鼓(琴)와 舞와 歌로 편성 되었다 했고 日本後記에도 新羅樂에는 鼓와 舞만이 보이는 것으로 봐서 新羅樂은 관악기와 타악기가 보이지 않고, 오직 현악기 한가지에 마추어 노래하고 춤추는데, 이점은 횡적(橫笛), 거문고, 막목(莫目,관악기)으로 편성된 高句麗, 百濟樂과 다르게 편성 되었다. 이것은 마치, 高句麗와 百濟의 고분구조가 같은데 新羅의 그것만이 양자와 판이하게 다른것과 상통 한다. 眞興王(540~576) 때는 于勒(우륵)이 伽倻國(가야국)으로 부터 "가얏고"를 가지고 와서 新羅에 퍼트렸는데 이뒤에 新羅의 "琴"은 伽倻國의 "鼓" 즉 "가얏고" 로 대치 된것 같다. 于勒은 대나마(大奈麻), 법지(法知)계고(階古), 대사(大舍)인 만덕(萬德)에게 음악을 가르쳤고, 伽倻國에서 받은 하가라도(下伽羅都), 상가라도(上伽羅都)등 12곡을 전수 했다. 위의 세사람은 이 12곡이 아정(雅正)치 못하다 하며 5곡으로 줄이고 바로잡아 新羅의 궁중음악인 대악(大樂)으로 삼았다. 于勒의 12곡은 일부가 잡희(雜戱)이고 나머지는 각 군(郡)의 음악으로 산신제와 같은 , 고을 마다 베푸는 의식음악으로 보인다. 이러한 郡樂은 "三國史記" 樂志에 보이는 新羅의 음악 20곡속에도 보이고 있다. 新羅의 종교의식 음악의 하나인 "팔관회(八關會)" 는 高麗를 거쳐 李朝에 까지 영향을 미쳤다.

(4). 남북조(南北朝) 시대,

    우리나라 역사속에서 남북조 시대라고 하면, 新羅와 遼 시대를 일컷는다. (여기서는 新羅에 한해서 말할 것이고 방대한 遼의 역사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로 미루겠다.)

통일이후의 新羅樂은 향악(鄕樂)발전이 두드러 졌다. 특히 가야금, 거문고, 비파의 삼현(三絃)과 대금, 중금, 소금의 삼죽(三竹)으로 대표 된다. 거문고음악은 옥보고가 지리산에 들어가 지은 30여곡이 있으나 전해지지 않는다. 비파음악은 212곡, 대금곡은 324곡, 중금곡(中琴曲)은 345곡, 소금곡은 298곡으로 이름만 전한다. 또한 唐樂이 유입 된 것도 통일 이후 이다. 문무왕(文武王) 4년에 사람을 보내 唐樂을 배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각종 유물에서 唐악기의 그림을 볼수 있다. 唐樂의 비중이 커짐에 따라 재래악 즉 鄕樂에 대조되는 唐樂, 唐비파, 唐피리, 唐풍의 범패(梵唄)등 唐나라에서 새로 수입 된 음악양식이 생기고 황종조(黃種調), 월조(越調), 평조(平調), 반보조(般步調) 와 같은 唐樂에서 쓰이던 調들이 쓰여지게 되었다. 한편 불교가 들어와 융성해 지자 범패가 많이 불리워 지고 또 唐에서 새로운 범패가 들어오자 新羅風, 唐風, 唐 이전의 古風 이렇게 세가지 범패가 불렸다. 新羅의 재래악은 가야금,춤, 노래로 편성되어 악기는 가야금만이 쓰이던 것이, 고구려의 거문고와 서역의 기원을 둔 비파(琵琶)가 쓰이고 대금등 관악기가 도입되어 新羅음악은 삼현육죽(三絃六竹)이 쓰이게 되었다. 최치원(崔致遠)의 "향악잡영(鄕樂雜詠)에 보이는 金丸, 月顚 같은 것들 모두 서역게 잡희인것과 같이 서역게의 음악의 영향도(실제로 高句麗樂의 영향으로 보는것이 옳다. 역자주) 받았다. 통일新羅시대의 唐樂과 鄕樂은 후세의 唐鄕樂의 기초가 되었다. 新羅에는 음악을 관장하는 공식적인 국가기관이 처음 등장하는데, 진흥왕때는 "음성서"로 불리다가 경덕왕 때는 "대의감"으로 고쳐 졌다가 혜공왕때 다시 "음성사"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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