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高麗時代(고려시대),

(1). 팔관회(八關會),

   명산대천, 용신(龍神)을 가무로 희열시켜 복을 비는 제도로 新羅國仙(신라국선, 화랑)의 유풍(遺風)이다. 연등회(燃燈會)와 더부러 高麗의 큰 국가의식의 하나로 궁중의 구정(毬庭)에 다섯길(五(丈)이나 되는 무대를 세우고, 사선악부(四仙樂部)및 용(龍), 봉(鳳) , 상(象), 마(馬), 차(車), 선(船) 등 여러가지 형태의 춤을 비롯하여 가무백희가 행해 졌다. 이 팔관회는 高麗초기에 극성기를 이루었고, 그후 쇠퇴하기도 했으나 말기까지 계속 하다가 긍세 朝鮮朝에 와서 철페 되었다.

(2). 宋(송)의 사악(詞樂)의 성행,

   宋의 음악이 高麗에 들어와 新羅 때에 들어온 唐樂을 밀어 냈다. "高麗史, 樂志"에 실린 당악(唐樂)이란 것은  사실 전부 宋의 사악(詞樂)이다. "詞" 라는 것은 장단구(長短句)라고 칭 하듯, 詩의 매행(每行)이 균일적으로 칠언(七言), 또는 오언(五言)으로 되어 있지 않고 칠언오언, 칠언육언 과 같이 길고 잛다. 그러나 그 불규칙적인 길이의 가사(歌詞)에 붙혀진 음악의 길이만큼은 규칙적으로 팔행(八行, 정간보(井間譜 로는) 이다. "高麗史(고려사)의 樂誌(악지)"에 실린 詞 41수중에서 8수가 中國시인의 하나인 유영(柳永, 11세기)의 작으로 판명되었는데, 그 판명으로 대개 11세기 이후에 高麗에 들어 온 것을 알수 있고, 詞의 하나인 낙양춘(洛陽春)이 "고려사, 악지"에 실려 있고, 구양수(歐陽修,1007~1072)의 작으로 판명되었는데, 사행일구(四行一句(미전사(尾前詞) 와 미후사)로 되어 있다. 또 한편 낙양춘의 악보는 18세기의 "속악원보(俗樂原譜)"에 실려 있는데,사일행(오자~칠자)이 규칙적으로 정간보의 팔행에 들어가는 박(拍)에 의하여 둘로 나뉜다(중약,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사전 , 한국음악 참조) 이 악보에 의하면, 中國 宋의 사악은 대개 일자일음(一字一音)이고 간주곡과 후주곡은 갖지 않는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3). 高麗의 향악(鄕樂),

   高麗朝의 향악은 "高麗史, 樂誌"의 29곡(曲)에 보여지는데, 그중 오관산(五冠山), 거사연(居士戀), 처용(處容), 사리화(沙里花), 장암(長岩), 제액보(濟厄寶) 정과정(鄭瓜停)의 7곡은 이재현(李齊賢,1288~1367)에 의하여 한문으로 역시(譯詩)되어 있어 그것들이 13세기 이전의 것들임을 알수 있다. 우리나라의 시가(詩歌)는 한시(漢詩)가 사행임에 비하여 삼행 또는 오행과 같이 기수의 행을 갖는것이 주목 된다. 그리고 음악에서는 그 일행에 이박이 들어 간다. 삼행의 예, 가시리(귀호곡,歸呼曲), 가시리 가시리/ 이꼬 나난 바리고 가시리/ 이꼬 나난 위 증줄가/. 오행의 예 청산별곡, 살어리 살어리/ 라ㅅ다 청산의 살어리/ 라ㅅ다 멀위랑 다래랑/ 따먹고 청산에 살어리 라ㅅ다/ 얄리 얄리 얄라/ 얄라성 얄라. "대악후보(大樂後譜)" 와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에 의하면, 향악은 대개 2자수음식이라서 中國의 일자일음식의 아정(雅正)한 것에 비하여 염려(艶麗)하여 이런점에서 고려청자의 화려함에 비 할수 있다.

(4). 高麗 향악의 악보,

    "고려사, 악지"에 그 명칭이 적힌 많은 향악곡은 대부분 악보는 물론 사설도 전하지 않지만 다행히 그 일부가 조선때까지 전승되어 악보와 사설이 남은 것도 있다."고려사,악지"에 명칭이 있는 것으로 현재까지 전하는 것으로는, 동동(動動), 서경별곡(西京別曲), 자하동(紫霞洞), 유림별곡(楡林別曲), 풍입송(風入松), 정과정(鄭瓜停) 등이다. 그밖에, 고려향악곡으로 악보가 전하고 있는것은, 사모곡(思母曲), 쌍화곡(雙花曲), 정석가(鄭石歌), 청산별곡(靑山別曲), 유구곡(維鳩曲, 귀호곡(歸呼曲), 상오가(相仵歌), 야심사(夜深詞), 만전춘(滿前春), 정읍(井邑), 이상곡(履想曲), 봉봉음(鳳鳳吟), 북전(北殿) 등의 악보가 전 한다. 이들 악곡들은 오늘날 거이 전승되지 못하고 끊겼으나 풍일송, 서경별곡, 봉봉음, 북전 등의 악보가 전 한다. 이들 악곡중 풍입송, 서경별곡 만전춘은 조선시대의 제례악에 편곡되어 지금도 언주 되고 있다.

(5). 향악정재(鄕樂呈才와 당악정재(唐樂呈才),

   정재란 궁중무용을 가르키는 용어 이다. 高麗 때 쓰던 정재에 新羅 때부터 내려오는 향악정재와 中國에서 들어 온 唐의 정재가 있는데 그 제도가 다르다. 당악정재에는 포구락(抛毬樂), 헌선도(獻仙挑), 수연장(壽延長), 오양선(五羊仙), 연화대(蓮花臺) 등이 있는데, 포구락을 예로들면, 죽간자(竹竿子), 정재에 쓰이느 도구로 긴 나무막대기 끝에 가는 대(竹)100개를 꽂았다. 이것을 든 여기(女妓) 둘이 관현반주 전인자(前引子)에 맞추어 무대에 들어와 서면, 동시에 음악이 끝나고 죽간자가 무반주로 한문으로 된 구호를 부른다. 다음에 무기들이 관현반주로 춤추며 들어 와 서면, 동시에 음악이 끊치고 무기들은 무반주로 한문의 창사(唱詞)를 부른다. 이어서 관현반주에 맞추어 춤울 추고 나서 용알을 구문(毬門)의 구멍에 던져 넣는다. 이것이 끝나면 죽간자 둘이 관현악반주(후인자)에 맞추어 나와 무반주로 구호를 부르고 나가고 뒤이어서 무기가 나간다. 향악정재는 , 동동, 아박(牙拍), 무애무(無碍舞), 왕모대무(王母隊舞) 등이 있는데, 동동으로 예를들면, 무기 두 사람이 들어와서 업드려 있으면 음악에 맞추어 동동의 첫구, 즉 덕과 복을 드리는 노래를 부루고 나면 업드려 있던 무기가 일어 나서 관현악과 제기(諸妓)의 합창에 맞추어 춤을 춘다. 춤이 끝나면 일어나서 퇴장 한다. 이와같이 향악정재는 당악정재와 같은 죽간자의 사용과 구호가 없고 창사처럼 무기가 노래하지 않고, 신라시대의 무척(舞尺), 금척(琴尺), 가척(歌尺) 과 같이, 고려시대의 정재도 무기, 관현악반주, 여성합창의 세부분으로 이루어 진 것을 특징으로 한다.

4). 朝鮮時代(조선시대),

(1). 전기,

    朝鮮 전기는 1392년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까지를 말 한다. 이 기간동안 있었던 음악사의 특색은, 첫째, 불교 억제 정책으로 말미암아 연등회와 같은 불교관련 행사가 페지되고, 둘째, 숭유(崇儒)를 바탕으로 하여 예악이 숭상됨에 따라 아악(雅樂)이 크게 일신 되었으며, 셋째, 건국대업을 칭송하기 위하여 많은 신악이 창작 되었고, 넷째, 이와같은 朝鮮 전기의 성대한 신악제도를 잘 보존하고 이의 결락을 방지하기 위하여 "악학궤범(樂學軌範)" 과 같은 악서가 발간 된 것들을 들 수가 있다. 먼저 아악이 일신 되었다함은 세종때에 편경 이하 아악기 전반이 새로이 제작 된것, 악기조율을 위하여 율관이 제작된것, 완전된 재래 아악을 페기하고 元의 임우(林宇)의 "대성악보(大晟樂譜)"에 바탕을 둔 새로운 아악곡을 제정한 것 등을 일컷는다. 신악의 창작은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제작과 그 가사를 사용한 "흥민악(興民樂)" "치화평" "취풍형"의 작곡을 말 하며, 이러한 朝鮮시대의 신곡을 후세까지 전하기 위하여 창안 된 "정간보(井間譜)"의 발명을 포함 한다. 

(ㄱ). 雅樂曲의 제작,

    朝鮮 초기의 아악은 대체적으로 高麗의 아악을 답습하였지만 1427년(세종 9 년) 12월에 제향, 아현, 종헌, 송신에 연주되었던 향악교주 전통이 페기되고, 제향이 처음부터 끝까지 순전히 아악기 연주로 일관 되도록 고쳤다. 뿐만 아니라 朝鮮 전기에는 재래의 아악곡이 페기되고 새 아악곡이 제정되어 아악 역사에 주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당시 아악제정작업을 주관하고 있던 박연(朴堧)은 당시 봉상사(奉常司)가 소장하고 있던 "조선국악장(朝鮮國樂章)"의 관보 아악곡중 "등가(登家)"의 음악이 음여(陰呂)에 속하는 음을 중심음으로 하지않고 헌가(軒家)의 음악과 같이 양율(陽律)의 음을 중심으로 하고 있음을 지적 하였다. 그리고 이와같은 "조선국악장"의 음악내용은 등가 와 헌가(軒家)의 음악이 각각 음려와 양율의 음을 중심음으로 하는 주례의 음양합성제도에 맞지 않을 뿐 더러, 그 출처도 불분명하여 혹 악공이 잘못 베낀게 아닌가 의심하며, 그 대신 참고 할 수 있는 유일한 악보로 元나라 임우의 "대성악보"를 들고, 이 악보에 전하는 16곡중에서 순수히 궁조(宮調)를 사용한 12곡(맹세곡(盟洗曲) 을 제외 한것 각각 12조로 이조한 144곡의 새로운 제사음악을 제정하였던 것이다. 이와같은 경위로 제정된 새로운 아악은 1430년 윤 12월에 발간 된 "아악보(雅樂譜)"에 실렸다. 

(ㄴ). 신악, (ㄷ). 정간보 ,(ㄹ). 당악, (ㅁ). 향악, (ㅂ). 고취악 (중약, 자세한것은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한국음악 참조 바람)

(2). 후기,

    朝鮮 후기는 광해군(光海君) 대로 부터 고종(高宗) 말(1910년)까지를 가르킨다. 이 시대 음악사의 가장 큰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새,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으로 인하여 국력이 피페하게 되자 국가 여러 의식에 수반되는 여러음악의 규모가 축소 되었다. 둘째, "종묘제례악(宗廟齊禮樂"을 비롯하여 고취악(鼓吹樂) "여민락령(與民樂令)" 특히 "해령" 당악 " 낙양춘" 향악인 "정읍"등의 곡에서와 같이, 음악의 템포(Tempo)가 완서(緩舒)하여짐과 동시에 무박자화 되었다. 셋쨰, 향, 당악정재가 그 고풍의 당악과 향악을 상실하고 향악교주(鄕樂交奏)에 의하여 연행되었으며, 그결과 "악학궤범"에 기록된 朝鮮전기의 정재와 내용이 많이 달라 졌다. 넷째, 정악(正樂) "영산회상(靈山懷想)"과 "가곡(歌曲)" 또는 "자진한닢"에 많은 변주곡의 추가로 인해 모음곡 또는 대곡으로 형성 되었다. 다섯째, 서민층에서는 긴 이야기를 말과 소리로 엮어 부르는 판소리와 기악독주곡의 형식인 가야금산조가 출현 하였다. 이상에서 알 수 있는것과 같이, 朝鮮 후기는 외래음악의 수용이 거이 없이 전통음악이 창작 발전 되었던 시기였다. 아악, 종묘제례악, 전정헌가, 전정고취, 정악, 가사, 시조, 가야금산조등은 민속음악 각론에서 말 하는것으로 하고 여기서는 약한다. 

5). 전통음악의 변천, 

   현대라는 말은 역사적으로 볼때, 근대를 거쳐 온 "오늘"과 동시대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경우, 광복이후 시대, 남북분단 시대, 대한민국 시대로 불리는 1945년 8월 15일 이후가 현대사에 속할 것이다. 오늘날의 한국 음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계음악이라는 보편속에 존재하는 한국음악의 특수성이라고 하는 점에 기초 하여야 한다. 여기는 한국민속예술에 관해 논의 하는 곳이어서 기회가 주어 진다면 다음 기회에 이야기 하기로 하고 이만 약하겠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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