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4.10 10:21
(9). 不放逸(불방일). 勤 과 無貪, 無瞋, 無癡 를 수련하느라고 바쁜 나날을 보낸다는 것이다. 不放逸이라는 心所가 따로 있는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는 勤, 無貪, 無瞋, 無癡 를 실천한다고 하는 것이다 라는 의미 이다. 이렇게 말 하는것은, 그들대로의 독자적 心所가 있다는것이 아니고, 다른 여러개의 心所를 조합하여 나타내려고하는 心所가 있는데, 이런 心所를 "假의 心所"라고 부른다. 이것에 반하여 "信"이라든가 "無貪"과 같은 독자적으로 작용(働)하는 心所를 "實의 心所"라고 부르고 있다. 善의 "假心所"에는 "不放逸" 외에 다음에 이야기 할 "行捨(행사), "不害(불해)"가 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중도반단(中途半斷)의 감을 가지게 하는 "假의 心所" 같은 것을 생각 해 냈던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선인들의 수도 생활속에서, 내성(內省)을 깊게, 분석을 세밀하게 해 가려고 하는 이유로, 또 독자적인 작용(働)이라고 말 하기 곤란 할 때, 그리고 여하튼 무시 할 수 없는 "마음"의 작용(働)에 직면 했을 때가 아니었을까. "實의心所" 들과 구별하면서, 그러나 도저히 抹消(말소)시킬 수 없는 "마음"의 작용(働)에 만났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옛선인들의 고심의 흔적이 엿 보인다.
(10). "行捨(행사)". 앞에서 말 했듯 이것은 "假의 心所". 구체적으로는 勤 과 無貪, 無瞋, 無癡 의 4개의 心所 이다. 이것으로서 "마음"을 평등하게 정직하게 無功用(무공용) 하게 만든다고 말 하고 있다. "평등"이란, 언제든지 변함이 없는 똑같은 상태 를 말 한다. "정직"이란, 아무것도 섞여지지 않은 똑바른 마음가짐. "無功用"이란, 그러한 생활태도가 몸에 자연적으로 구비되어 있는 상태를 말 한다. "捨"라고 하는 말에 대해서는, 따로 苦, 樂, 捨 의 捨, 즉 非苦非樂을 나타내는 말도 있기 때문에 혼동하게 하지 않기위해서 여기서는 "行捨" 라고 했다. 非苦非樂 의 "捨"는 "遍行"의 心所 의 "受" 즉 苦,樂,捨 내지는 苦,樂,憂,喜,捨(고락우희사)의 하나의 상태 라는 것이다. "行捨"는 "마음"을 寂靜(적정, 고요하게하는)하게 하는 작용(働)이라고 한다. 좋은 수행이란, 언제나 똑 같아서 기복없이 지속 되는 수행을 말 한다. 어떤때는 눈을 부릅뜨고 격렬하게 수행 한다던가, 어떤때는 모든것을 잊은 듯 나태한 생활 태도를 보이기도 하는 조용한 수행을 반복 하기도 한다고 할 때, 이와같은 행위가 없는 수행이라면 더 할나위 없이 좋겠지만, 수행이 정말 몸에 익숙 해 진다는것은, 그러한 기복을 초월 했을 때라는 것이다. 조용한 경지에서, 자연스럽게 情進 할 때, 진정한 無貪, 無嗔, 無癡의 禪定이 실천 되게 된다는 것이다.
(11). "不害(불해)". "타의 유정(有精)을 損惱(손뇌, 해치지않는)하지 않으며, 悲愍(비민, 슬퍼하며 근심한다)한다"라고 하고 있다. 이것 역시 無瞋의 心所의 일부분 이다. 즉 "假의 心所"라는 것이다. 이렇다고 할때, 無瞋과 不害는 어덯게 다르다는 것인가. [成唯識論]은, "사물(物)의 命을 斷하지 않는것이 無瞋, 사물(물)을 損惱하지 않는것이 不害"라고 설명 한다. 앞에서는 "無瞋은 樂을 與(주고)하며, 不害는 苦를 拔(뺀다)한다" 라고 했다. "無瞋'은 마음속의 문제, "不害"는 그 마음이 발동하여 他에 위해를 주지않는다고 하는 他와의 관계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렇기때문에 佛敎의 역사는 "不害"의 역사였다고 말 할 수 있다. 불교는 기본적으로는 타종교와 그 교단들을 파괘하는 행위같은것은 하지 않는다. 관용과 포용ㄹ력의 사상의 역사 이다. 인도에서는 그러한 역사가 伏流水(복유수)와 같이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마하틀 간디(1869~1948)의 무저항주의, 불복종, 불협력운동 같은 것도 이러한 水脈(수맥)위에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 한다.
이상 11개가 善의 心所의 개요 인데, 전술했던 것과 같이 "善이란 무엇인가"라고 하는 질문의 해답 이다. 밑바닥에 "勝義善"이 깔려 있다고 하는 의미로는, 관념적인 부분을 완전히 捨去(사거)할 수는 없지만, 구체적으로는, 조직적인 이론과 체계적인 관념으로 답하는 것이아니라, 현실의 "마음"의 상태 위에서 답 하고 있다는 면에서는 대단하다고 생각 한다. 이리하여 이렇게 "善"의心所가 작용(働)하게 되는것은, 因位(인위)로는 六識과 注(물댈 주, 연결되어잇다)되게 된다. 佛果位까지 도달하게 되면 八識전체가 선의 心所로 꽉차게 되지만, 因位에서는 第 8 阿賴耶識, 第 7 末那識은 善의 心所와 같이 작용(働)하게 되는 일은 없다. 외냐하면 제 8 식 과 제 7 식 은 다 같이 無記法이기 때문 이다. 때문에, 우리들은 無記法이라고 하는 존재 아래레서 6 識 에 의하여 善을 積重(적중, 쌓아간다)해 가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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