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민속예술, 민속춤 그4.

2023.05.17 12:43

김일하 조회 수:17

6). 처용무 (處容舞)의 주술성(呪術性)과 문화적(文化的)전개(展開).

   처용무의 연원은 新羅 헌강왕(憲康王)때의 처용전승(處容傳承)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헌강왕이 개운포(開雲浦)에 나갔다가 홀연히 안개와 구름에 휩싸인다. 동해용왕의 조화라는 일관의 말을 듣고 동해용왕을 위하여 근처에 절을 세우도록 명하니 구름이 걷히었다. 동해용왕이 기뻐하여 아들 일곱을 데리고 왕 앞에 나타나서 덕을 찬양하며 춤추고 음악을 연주 하였다. 그 가운데 한 아들이 왕을 따라 와서 정사를 보좌 하였는데, 이름을 처용이라 하였다. 왕이 미녀로서 처를 삼게하고 급간의 벼슬을 주었다. 역신(疫神)이 처용의 아내를 흠모하여 몰래 동침 하였다. 처용이 밤 늦게 돌아와 보니, 두사람이 자리에 누어 있는것을 보고 "처용가"를 부르며 물러 났더니, 역신이 감복하여 처용앞에 꿀어 앉아 용서를 빌며, 다음부터는 처용의 형용한 그림 만 보아도  그 문안에는 들어가지 않겠다고 맹세 하였다. 이로인하여, 나라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문에 붖쳐서 사악한 것을 물리 치고 길한 것을 받아 드렸다(삼국유사권2, 처용랑 망해사조) 처용신화에 대한 논의는 각분과 학문에 두루 있었고 종합적인 고찰도 시도한 바 있다.(처용설화의 종합적 고찰, 대동문화연구 별집) 어학, 문학, 민속학, 연극학, 역사학 쪽의 연구가 해당분야의 학문적 성과를 거두는데 일정한 기여를 했으나, 처용무에 대한 무도학(舞跳學)쪽이 관심은 아직 들어나지 않은 셈으로 여기서는 춤의 문제로 한정해서 다룰 것이다. 이기록에서는 두가지 춤이 보인다. 하나는, 처용의 아버지인 동해용앙과 일곱 아들이 헌강왕의 배려에 감사하는 춤이고, 다른 하나는 , 처용이 역신의 부정을 너그러히 용서 해 주는 춤이다. 은혜와 침해에 대한 두 극단적인 두 상황에 대하여 한결같이 춤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두 극단을 한가지 방법으로 해결하는 춤의 포괄적 기능이 다시 입증된 셈이다. 특히 처용춤은 용서의 춤으로서 공격의 춤 이상의 역설적인 성취를 얻어 내는 데 까지 이르렀다. 역신을 다스리는 춤은 공격적인 나아감의 춤이여야 하지만, 처용은 물러나면서 춤을 추었던 것이다. 그러나 공격적인 춤이상의 성취를 물러남의 춤에서 이루었다. 적을 물리적으로 물리쳐 굴복시키는 구실이 아니라, 적과 더불어 하나 되게하는 춤의 대동적 통합기능을 발휘 한 것이다. 처와 동침하는 역신을 물리친 춤은 굿의 춤이기도 하다. 처를 두고 벌어진 처용과 역신의 갈등을 주술적으로 해결한 춤이기 때문이다. 처와 역신이 동침 했다는 것은 처에게 질병이 들었다는 것이나 다름 없다. 물론, 남편 아닌자와 동침 했다는것은 마음의 병일 수도 있겠지만, 역신과 몰래 동침 했다는 것은 인간의 마음 갖임으로서는 어쩔수 없이 걸리게 되는 육체의 질병인 것이다,(실제로 민속에서 학질을 앓는 사람을 보고 '처녀귀신이 붙었구나' '장가들었구나' 라고 하는 것과 같이 남자에게는 여자기신이, 여자에게는 남자귀신이붙었다고 하는 관념이 있는것과 같은 유형이라 하겠다. 최정여, 처용 구나(驅儺)의 양상, 신과 민속의 신연구, 신라문화제 학술발표회 논문집, 경주사1985) 또 처용의 형상이 사귀(邪鬼)를 물리 치는 구실을 한것으로 보아서도 그렇다. 처용춤이 주술적 춤이라면,  처용은 처의 질병을 퇴치 하고자 이른바 무가를 부르고 무당춤을 춘것이니, 무격(巫格)이 되는 셈이다. 처용은 원래 무격으로서 보좌왕정(補座王政)하고 나라 사람들에게 굿을 베풀었는데, 자기 처가 질병에 걸리자 병굿으로 치료를 한 것으로 볼수 있고, 역으로 질병에 걸린 처를 치료하고자 노래부르고 춤을 추었는데, 효험이 있어 무격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헌강왕은 나라의 위기를 굿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사방에서 굿을 거행하고, 처용이 역신을 물리치는 굿을 새로히 등용해서 '보좌왕정'하는 구실을 맡겼다고 보았다. (조동인, 탈춤의 역사와 원리 ,홍성사 1979) 어느쪽이든 처용은 예사 사람들이 해 낼수 없는 일을 노래와 춤으로 해결한 셈이다.이러한 능력이 처용을 "보좌왕정"하는 급간의 벼슬에 앉게 한 것이다. 사람들이 춤을 갈망하는 까닭은, 춤을 추는 사람은 주술의 힘을 얻게 되고 그 주술은 그에게 승리와 건강과 생명력을 가져다 주기 때문인 것이다.(쿠르드 쟉스작, 김매자역,세계무용사, 풀빛1983) 처를 뺏기고 추는 처용의 춤도 이러한 시각에서 이해 될 수 있다. 역신에 대해 주술적인 힘을 발휘 했던 처용의 춤은 푸닥거리하는 처용굿을 이루고, 한편으로는 처용의 형상을 문에 붖쳐서 잡귀를 물리치는 부적의 구실을 하게 됬다. 문에 붖친 처용의 형상은 "벽사가면(劈邪假面)으로 보고 처용가무를 가면무극으로 추정 하기도 한다.(이두헌,'한국의가면극' 읽기사 1979) 따라서 처용면의 형상은 눈을 부릅 뜨고 이를 들어 낸 무서운 귀면이 었다. 귀면인 처용면이 高麗에 들어서면서 "유덕하신 처용" 으로 일컷게 되는 인간의 옹면(翁面)으로 변모 했다. 高麗의 처용가무는 산대잡극(山台雜劇)의 중심적인 연행물로서 등장 했으며, 노래의 사설도 바뀌었다. 高麗 가요로 전승 된 처용가는 청배(請拜), 찬신(讚神), 구나(驅儺), 주어(呪語), 귀도(鬼逃)의 형식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처용과 역신 그리고 제3자의 발언으로 구성되어 있어 세 배우가 등장하여 굿을 진행시키는 무극적인  구도를 갖이고 있다. 특히 高麗의 처용가에는 처용이 무격이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아으 계면(界面)도랴사 넘겨신 발에" 라고 한 것은 "界面"을 돌아 보느라 발마저 넓어 졌다는 뜻이다. 界面은 무당의 단골구역을 뜻하는 말이다. 무격으로서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당골구역을 수없이 돌아 다니며 발이 넓어졌다고 하니, (최정여,싱라민족신 연구,경주사) 가히 처용의 직능을 알만 하다. 朝鮮 朝에도 계승되어 궁중의 잡귀를 쩢는 나의(儺儀)의 춤이 되었다. 高麗 말에는 처용무가 2인무 였으나, 朝鮮 朝에서는 3인무로 바뀌었다. 이것이 다시 오방처용무(五方處容舞)로 바뀌는 한편, 세종, 세조 조에서는 학련화대처용무합설(鶴蓮花處容舞合設)로서 종합가무극으로 크게 수정되어, 합설무와 오방무가 공존하게 되었다.(이두헌, 한국의 가면무,일지사 1973) 궁중의 구나의식에서는 합설무가 추어졌으나, "악학궤범"에 소개 된 오방처용무의 내용은 일부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춤추는 사람은 다섯명, 동서남북 중앙으 다섯방위를 상징하는 청홍백흑황의 옷을 입고 처용의 탈을 쓴 다음, 한사람씩 무대에 나아가 한줄로 선채 처용가 반주에 맞추어 처용가를 일제히 부른다. 노래가 끝나면 선자리에서 다섯 사람이 함께 두팔을 올렸다 내리고 서로 마주 대하고, 또 등을 대고 마주 한 다음 발바딧춤으로 3보 앞으로 나아가서 다시 사방을 지은 뒤에 또 서로 마주 대하고 등을 돌려 서로 대하는 춤을 추고 , 왼쪽으로 돌면서 추는 춤과 오방수양무를 춘다.이 오방수양무는 가운데 춤꾼이 사방의 춤꾼과 개별적으로 대무하는 춤이다. 이 춤이 처용무의 고비 이다.(이두헌 ,한국의 가면무) 이 춤은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는 오방처용무이다. 춤꾼이 다섯방위에 따라 5명으로 정선 되고 노래와 춤사위가 궁중정재무로 엄격히 다듬어 진 것이어서 처용춤의 본디 모습과 얼마나  닮았는지 예측하기 어렵다. 그러나 춤꾼들이 같은 동작으로 두팔을 오르 내리며 서로 대무하는 것은 馬韓의 춤과 비슷한데가 있어 주목을 끈다. 朝鮮 순조조에 이르면 오방처용의 사이에 4명의 기녀가 머리에 꽃가지를 꽂고 함께 춤을 추었으며 , 다음해엔 기녀들이 추던 자리에 관복 차림의 무동들이 함께 춤을 추어 순수성이 점차 사라져 가는 느낌을 주었다고 한다. (최정여,논문) 앞의 논의에서 우리는 처용춤이 역신을 몰아내는 주술적인 춤, 즉 新羅의 처용굿에서, 高麗朝에서는 산대잡극의 중심적인 처용무극으로, 朝鮮朝에서는 궁중의 구나무와 연희무로 발전하여 굿에서 극으로 또는 인간적인 즐김의 춤으로 이행 됬음을 살펴 보았다. 처용춤의 본래 기능인 주술적인 굿이 예술적인 극으로 발전 하는 한편, 주술적인 기능이 축소되어 유희적인 춤으로 변모 되었다. 이러한 변모는 기녀나 무동들의 참여여서 뿐 아니ㅣ라, 新羅, 高麗 처용가와는 달리, 朝鮮처용가라고 할수 있는 "잡처용"의 사설을 통해서도 확인 할수 있다. 잡처용의 사설은, 태종대왕이 전좌를 하려고 하니 중문안에 있는 쌍처용아바는 처용의 상이나 가면으로서 평시에 궁중의 중문안에서 구나의 부적기능을 하다가 태종대왕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올릴때는 일단 외문밖으로 내 보내는 것이 아닌가 한다. 따라서 잡처용은 처용춤과 함께구나의식에서 불려졌던 노래가 아니고, 궁중의 종묘제사떄, 태종대왕의 신위를 모시면서 불렀거나, 아니면 궁중에서 태종대왕을 칭송하는 연악으로 불렀던 노래인것 같다. 노래의 이름도 잡처용이라 하여 처용의 권위를 비하 시켰을 뿐만 아니라, 노래의 내용에 있어서도 처용가의 본래기능인 역신에 관한 내용은 전연 없다.(임재해, 시용향악보 소재 무가류 시가연구, 영남어문학 1982) 처용춤의 변모 과정은 일반적인 춤의 역사와 비슷 하다. 쿠르트 쨕스의 세계무용사에 의하면 , 석기시대에서 부터 춤은 예술작품이 되었고, 철기시대 초기에는 전설이 춤과 결합되어 춤을 극으로 끌어 드렸으며, 보다 고도의 문명시대가 되면 춤은 한층 좁은 의미의예술로 되었다고 한다. 처용춤이 시대적 변모과정과 절대연대로서는 일치하지 않으나 상대적으로는 같은 발전 과정을 거치고 있는 것이다. 처용무를 축으로하여 우리 무용사를 구성 해 봄직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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