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민속의역사;

 1). 선사시대.

     옛문헌의기록들은 어느나라에서나 영웅, 왕공,귀족들에게 치우치고, 민속의기록자료는 매우 드믈다는 것이공통 현상이다. 한국에서는 그런 경향이 더 강했다. 예컨데, 세시풍속(歲時風俗)같은같은 것을 기록한 책이 나타나는것은 朝鮮시대후기에 와서 된 일이다. 따라서 상대의민속을 예술(預述)한다는 것은무리이다. 전거(典據)를 찾아야 한다고 하여도, 결국 단편적이거나 추측의 역사를 벗어나기 어렵다. 민속의 역사만이 아니고 문화사 자체가 기본적으로는 농경문화의 역사 였다. 농경의 시작은 신석기시대 부터이고 년대는 서기전 5,000~ 7,000년 사이의 4,000년간으로 여겨지고 있다. 아직 출토된 곡물은 조, 피, 수수 정도이지만, 그래도 이 장구한 기간에 초기 농경사회적인 정착생활과 그에 따르는 세시풍속은 그 나름대로 형성되어 왔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기본적으로 세시풍속이란 인류의 생활에 계절의 환경적 변화 만 있으면 형성될 수 있는 것이라는 점도 고려 할 만 하다. 청동기시대(靑銅期時代)는 곡식의 종류가, 조, 수수, 피, 에서 보리, 기장, 콩, 팥, 쌀까지 늘어 났으며, 농경적인 정착생활은 곡식을 거두어 드린뒤 동장(冬藏)의 한가한 계절을 휴식과 종교와 예술과 놀이로 보내게 된다는 것이 인류학적인 한 상식이다. 청동기시대는 어디서나 금속문화가 시작되는 시기로서, 초기의 국가형태를 갖추게 되는 시대 이다. 청동기시대에 한국무속(巫俗)의 장엄하고 뚜렷한 첫 증거품으로서 청동의기(靑銅儀器)들인 거울과 방울과 칼의 세종류가 있다. 이종류는 지금껏 금속무구(金屬巫具)로서 중요시 되고 있는 명두(明斗,明圖(명도,무당이수호신으로 삼고 섬기는 거울),태주), 무당방울과 칼의 종류가 합치되어서 무속의 역사를 아울러서 증명 해 주고 있다. 먼저 거울인 多紐細紋鏡은 그 정교한 문양으로 현대의 명두(거울)를 완전히 무색하게 한다. 방울도 마찬가지이나 특히 방울은 팔두령(八頭鈴), 오두령(五頭鈴), 그리고 다시 다양한 두개의방울 형태들이 출토되어서 무속의 춤과 노래의 형태가 다양했으리라는 것을 짐작시켜 주고 있다. 창검종류로는 다시 세형동검(細形銅劍)에 과(戈), 모(矛)들이 있고, 그중 전혀 날이 서있지 않아서 고고학계에서도 종교의기라고 지적하는 것들이 있다. 이상 청동기들이 현대의 금속무구들 보다도 놀랍도록 정교하고 훌륭한 이유는 간단히 설명 될수 있다. 오늘날 무속은 서민층의 민속으로서 미신의 대명사 처럼 되어 있고, 이 청동의기들은 제정일치사회의 군장이자 제사장의 존엄성 까지를 보여주는 상징성을 느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최남선은 단군(壇君을 제정일치사회의 제사장으로 보고 천부인(天符印) 세개를, 거울, 검, 그리고 북과 방울중 어느 하나인 셋이라고 추정한 바 있다. 이렇듯이 청동의기들은 귀중한 종교이식의 중요한 도구 이기 때문에 그 출토 수도 많지 않다. 그러나 그 분포는 남만주(滿州), 한국, 日本, 북구주(北九州)에 걸친다. 이 사실은, 이러한 무속의 초기 증거품들이 대국적으로 시베리아 샤마니즘(Siberia shamanism)의 흐름위의 것이지만, 부여(扶余), 高句麗의 옛터와 韓반도에서 완전히 이미 한국화되고, 그 흐름의 한 갈래가 日本 에서도 오늘 날 까지 전승되는 신도(神道)의 한 원류를 이루었가는 것을 시사하고 남음이 있다. 이러한 사실은 韓日양국의 유사성을 보이는 청동기출토품, 현대의 무구, 신화에 나타나는 3종의 신성기구등이 더불어 말 해 주고 있다. 같은 청동기의 한 종류로 농경문청동의기(農耕紋靑銅儀器)가 있는데, 여기에는 한국 최초의 풍속도 이자 풍요기원의 농경그림이 새겨저 있는 것이 주목 된다. 그 한면에는 나뭇가지에 새가 있는 "솟대"인 듯한 그림이 있다. 또, 한면의 왼쪽에는 곡식 항아리에 퍼 담는듯한 모습이 있고, 오른쪽에는 따비와 굉이로 각각 밭갈이 하는 두 인물의 모습이 있다. 그리고 유일하게 전신이 다 보이는 한 남성의 큰성기가 풍요기원의 의식을 표현하는 듯하다. 이를통해서 고금의 굉이와 따비등의 농기구의 역사도 확인 할수 있다. 부족국가(部族國家)시대에 오면, 우선 단편적이 나마 中國史書(중국사서)의 기록들이 보인다. 3세기의 문헌인 "三國志, 東夷傳(동이전) 扶余傳(부여전)" 에는, 흰옷을 숭상한다든가, 가물어 농사가 안되면 책임을 왕에게 돌리고 마땅히 밖거나 죽여야 한다는 등 심히 종교적인 종교적기원성의 기록을 보이고 있다. 또 유명한 현사취수(兄死娶嫂)라든가, 高句麗의 서옥(壻屋) 같은 결혼풍속도 기록으로 전하고 있다. 동옥저전(東沃沮傳)에는 분명히 이차장(二次葬)의 장법을 연상케 하는 기록에 쌀 미(米)자의 기록도 나온다. 변진전(弁晉傳)에도, 오곡과 벼(稻)를 심기에 알맞다는 기록이 보여서 벼농사가 이미 상당히 보급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韓傳은 물론, 예전(濊傳)에도 "삼베와누에뽕이 있다, 有麻布蠶桑"고 하였으니, 이때 명주짜기도 보급 된듯 하다. 논농사에 삼베, 명주짜기 까지 짜게되면 세시풍속은 이제 상당히 복잡해 질수 밖에 없다. 기곡상에는, 먼저 각부족국가들의 제천의식들이 매우 크게 주목 된다. 扶余의 영고(迎鼓)는 은력(殷曆)정월(正月)로서 하늘에 제사하고 나라사람들이 크게 뫃여서 연일 음주가무하니 이를 "迎鼓" 라 한다. 이때는 형벌과 옥사를 중지하고 죄수의 무리들을 풀어 준다. 고 했다. 殷曆의 正月은 夏曆이나 현재 음력으로 치면 12월이다 , 그것은 복잡한 역법상의 기준차이 일뿐, 년초라고 하는 관념에는 차이가 없을 것이다. 즉, 지금도 신년정초를 명절이나 공휴일로 삼고 경축하며 죄수들을 특별 사면한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것으로 비유된다. 다만, 여기서 주목할 것은 세시풍속의 명확한 기준이 되는 것이 이미 이때에 사용 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이 같은 3세기, "三國志""魏志" 東夷傳 뿐만 아니라, 훨씬후의 7세기초 "梁書" 東夷傳, 倭人傳(왜인전)에는, 아직 "정확한 세월과 사계절을 모르고 다만 봄이 되면 갈고 가을이 되면 거둔다(其俗不知正歲四節但記春耕秋收爲年紀)" 라고 기록되어 있다. 역법의보급이 그만큼 오랜 시일이 걸렷던것 같다. 濊傳의 "舞天(무천)"도 유사한 내용이다. 다만 그 시기가 10월이고, 범(호랑이)을 신령으로 섬긴 다는 기록이 주목을 끈다. 虎神觀念(호신관념)응 특히 지금까지도 영동지방의 산간에 더 많은 것으로, 특히 대표적으로 강능 홍제동 여서랑신 그림에까지 곁들여 진 범의 그림을 들수 있다. 범을 신령으로 섬기는 신앙행위는 잇달아 있어 온 우리의 전통이라 하겠다. 十月(시월)은 "東盟(동맹)"의 기록과 같이 시월상달에 관련되며, 역시 농경의례의 하나인 추수감사제라는 세시풍속이 행해지는 중요한 달 이다. 高句麗傳은 十月祭天에 국중대회 하는 것을 "東盟"이라 하고, 다음과같은 설며을 붙이고 있다. "그 나라 동쪽에 수혈이라는 큰 굴이 있고, 시월 국중대회 는 이 수신을 맞아서 나라 동쪽에 모시고제사 하는데 목수를 신좌에 놓는다(其國東有大穴名隧穴十月國中大會迎隧神還於國東上祭之置木隧於神坐)". 隧는 긴, 굴, 또는 大穴神(데혈신)이라는 글자이니, 木隧는 木刻窟神像(목각굴신상)이라는 말이 되겠다. 후세의 "周書(주서)" 나 "北書" 高句麗傳에는 "나무로깍은 여신상(木刻作婦人像)" 기록이 나오는데, 高句麗의 木隧도 그러한 여신상이 아니었을까 생각 된다. 본토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 볼수 있지만, 특히 제주도 신당중에는 굴(穴)을 당으로 삼는 경향이 강하고, 또 당신(堂神)에 女神(여신)을 섬기는 경향이 많은 것으로 보아서 이것도 또한 오늘날 東祭堂과 맥이 상통하는 하나의 원초형태로 충분히 생각 할수 있을 듯 하다. 다시 韓傳에는 " 늘 5월에 씨 뿌리기를 마치고 나서, 귀신을 제사하고,,,, 10월에 농사가 끝나면 역시 다시 이같이 한다" 고 하였다. 여기서는 이것이 "농경의례" 라는 것을 직접 분명하게 기록 하고 있다. 이상을 종합 해 볼때, 이 부족국가들의 "제천의식" 은, 오늘의 동제(洞祭)의 원초적인 상황을 충분히 연상시켜 주고 있다. 엄숙한 제전이 아니라, 즐겁고 활기 찬 축제라는 점에서 지금의 동제와 다소 차이는 있으나, 아직도 축제형식의 "마을 굿"이 동제의 제의양식으로 전승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古形의 洞祭는 國中大會의 제의양식에 바탕을 두고 있었음을 알수 있다. 뿐만아니라, 정월,  오월, 시월 이라는 시기도 오늘날 설, 대보름, 단오 그리고 시월 상달등의 명절들과 상통하는 바가 뚜렸하다. 이상모든 상황들을 종합 해 보면, 오늘날 모든 민속세시풍속들을 일일이 구체적으로 기록 해 주지는 않았서도, 이미 거기에는 농경문화의 근간으로 해서, 오늘날 민속원류의 대강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을 짐작 할수 있다.

  

X
Login

브라우저를 닫더라도 로그인이 계속 유지될 수 있습니다. 로그인 유지 기능을 사용할 경우 다음 접속부터는 로그인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 게임방, 학교 등 공공장소에서 이용 시 개인정보가 유출될 수 있으니 꼭 로그아웃을 해주세요.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