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민속예술(朝鮮시대)

2022.11.25 10:59

김일하 조회 수:14

4. 朝鮮시대,

  朝鮮시대의 세시풍속과 민속의역사에서 당연히 먼저 전제되어야 할 사항은 불교관계행사의 쇠퇴와 유교관계행사의 융성이다. 이미 지적 하였듯이 高麗시대의 八關會(팔관회)는 朝鮮시대에 들어 와서는 페지되었다. 盂蘭盆會(우란분회)는 지속되었으나 상당한 쇠퇴를 보이는 반면에 농경의계절과 직결되는 百中(백중)은 견지 되었다. 燃燈(연등)은 高麗시대 귀족층의 호화찬란 했던 행사는 쇠퇴 하였지만, 朝鮮시대에 들어와서도 계속 민간에서는 성황을 이루었던 것이 후기의 세시기에도 보인다. 한편, 高麗말부터 화려하였던 "家禮(가례)에 의한 조상제사는 더욱 사회기강으로 강조 되었으나, 祖堂(조당)을 짖고 참배한다는 일은 하루아침에 보급되는 일은 아니었다. 그런점에서는 배불숭유(排佛崇儒) 라는 말은  간단하지만 실행은 어려워서 100~200년의 긴 세월에 걸쳐서야 조곰씩 보급 되어 갔다. 그러나 관등이나 우란분회 처럼 민중사회속에 자리잡았던 불교적인 세시픙속은 뿌리채 없어지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이렇게 해서 보급된 유교제례는 강한 혈연성과 가부장권의 강화로 단순히 민속이나, 세시풍속 뿐 아니라 사회풍조에서부터 인간심성까지도 크게 변화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朝鮮시대 후기에 들어서면서 정식으로 세시풍속을 기록한 柳得恭(유득공)의 "京都雜記(경도잡기), 18세기말" 金邁淳(김매순)의 "列陽歲時記(열양세시기), 1819년"  洪錫謀(홍석모)의 "東國歲時記(동국세시기), 1849년"등이 있어 이제 그 상황은 아주 명백 해 진다. 이것은 한국세시풍속의 역사를 살피는데에는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책들이기 때문이다. 이중 가장 종합적인 "동국세시기"를 중심으로 朝鮮시대세시풍속을 개관 해 보면, 正月元旦(정월원단)에는 대궐안의 朝賀(조하), 민간에서의 茶禮(차례), 歲粧(세장), 歲酒(세주), 問安婢(문안비), 새해인사로 선생이나 관원에게 자기이름을 적어 보내는 歲銜(세함), 떡국, 대문에 붙이는 잡귀를 쫒는 장수같은 것들을 그린 歲畵가 있다. 이 설날풍속에는, 70, 80 노인들에 대한 경노행사, 三災(삼재)를 면하는 법, 좋은 말로 새해인사를 하는 德談(덕담), 새해 첯번 들려오는 소리로 일년간의 운수를 점친다는 聽잠?(청잠), 五行占(오행점), 일년동안 빠진 머리카락을 모았다가 불사르기, 야광귀신, 중들이 시주를 얻으려고 치는 法鼓(법고) 무당의 무가에 재물을 내어 준다는 제주도의 花盤(화반) 등이 있는데, 이상 14종이 설날의 풍속으로 기록 되어 있다. 立春(입춘)에는, 대궐 안 기둥에 좋은 글을 써서 붙이는 春帖子(춘첩지), 민간에서도써 붙이는 春聯(춘련) 또는, 立春日에 부적, 봄나물, 함경도 관청에서 권농의 뜻으로 牧牛(목우)를 끌고 다니는 일들의 순서로 5종의 기록이 있다. 다음 7日인 寅日(인일)奎章閣(규장각)관리들에게 거울을 나누어 주는 銅人勝(동인승), 임시과거시험인 人日製(인일제)가 기록되었다. 그리고 上亥日(상해일)의 되지주둥이 지지기 놀이, 上子日(상자일)에 쥐 주둥이 지지기 놀이등의 (지위가 얕은 내시들 수백명이 불을 들고 궁궐안을 돌며 되지불태워라, 쥐불태워라 하며 구석구석 돌아 다니는 놀이)행사기록이 있다.  上元대보름날 행사로는, 약밥, 禾積(화적), 제웅치기, 어린이들의 호리병 차기, 복토훔치기, 부럼까기, 귀밝이술, 묵은나물, 오곡밥, 더위팔기, 百家飯(백가반), 개보름쇄기, 과일나무시집보내기, 연날리기, 팔랑개비, 돈치기, 달맞이, 달점치기, 다리밟기, 석전, 밤새우기(守歲), 안택굿, 달그림자점, 재주발 점, 닭을음 점, 용알 뜨기, 횟불싸움, 줄다리기, 차전(車戰), 놋다리놀이, 풍기 아전들의 소놀이등 32건의 기록이 있다. 正月내의 기타 풍속으로, 정초의 가개휴업, 임시과거인 春到記科(춘도기과), 愼日(신일, 첫 쥐 용 말 되지 날들 등의 삼가하는날), 16일의 꺼리는 날, 매년 24일의 흐리는 날, 남자들이 조심하는 敗日(패일), 萬減日, 三敗日(14,15,23), 등 7종이 기록되어 있다. 2월1일은, 中和節(중화절)에 농사가 힘써야할 근본이라고 中和尺(중화척)을 관리들에게 하사 하는 날, 머슴날(奴婢日(노비일), 시절음식의 떡종류, 노래기부적, 충청도, 경상도, 제주도의 靈登神 (령등신)신앙,  등이 있다. 

3월3진날의 花煎(화전), 시절음식들, 鎭川(진천)의 용왕당과 삼신당신앙 등이 있고, 淸明(청명)에 각관청에 대한 느릅나무와 버드나무로 일으킨 불씨 나누어 주기와 봄 갈이 시작, 寒食(한식)의 산소의 절사(節祀), 寒食의유래, 그밖의 3월의 풍속으로, 각종술, 떡, 생선, 야채등 수십종의 시절음식이 있다. 또, 놀이로는, 화류놀이, 활쏘기, 풀각시, 버들피리, 강능의 청춘경로회, 경주의 사철유택(遊宅)남원의 활쏘기, 용안의 향음주례(鄕飮酒禮), 제주도의 당제사, 청안의 국사신제사 등의 기록이 있다.4월8일, 燈夕(등석)의 화려히고 자세한 觀燈(관등)설명, 시절음식, 물동이바가지장단 놀음, 기타 4월의 풍속놀음으로 또 시절음식, 봉숭아꽃물들이기, 능천의 熊山神堂祭(웅산신당제) 기록이 있다.

5월 端午(단오)에는, 관리들에게 쑥호랑이(乂虎,예호)를 하사 하시는 일, 부채를 하사 하시는 일 과 많은 부채의 종류와 명칭, 사용법의 설명, 단오부적, 창포탕, 창포비녀, 그네뛰기, 씨름, 수릿날 어원설명, 쑥떡, 쑥잎의수리취(부싯깃), 약용익모초, 대추나무시집보내기, 김해의 편싸움(石戰), 금산 직지사의 단오씨름, 군위에서의 金庾信祀堂(김유신사당)端午祭, 삼척의 단오제, 안변의 霜陰神祀宣衛大王夫婦端午祭(상음신사당선위대왕부부단오제)등의 행사가 있다. 5월의 기타 풍속으로 大宗雨(대종우)의 내력, 보리,밀 들의 조상에 대한 天神 장 담그기 등이 있다. 6월15일 流頭(유두)에 머리감기, 流頭宴(유두연), 십여종의시절음식, 삼복의 개장과팥죽먹는 풍속, 기타풍속으로,다시여러종류의음식시식, 서울각처에서의 濯足(탁족), 진주의 년래행사인 임진외란때의 성함락추모등이 있다. 

7月7夕의 햇볕에 옷말리기, 15日의 盂蘭盆會(우란분회), 百中(百種)에 충청도 씨름놀이, , 7월의 기타풍속으로 卿士大夫(경사대부)의집에서는 올벼로 천신에게 제하는 기록이 있다. 8월秋夕(추석)명절과 그 유래, 제주도의 줄다리기(照里戱(조리희)와 그네뛰기, 기타 8월의 풍속으로 충청도의 16일의 씨름대회, 많은 음식의 기록이 있다. 9월9일 重九의 菊花煎(국화전), 화채등의 시절음식, 남산,북악산등의 登高(등고)와 단풍구경등으로 9월기록은 제일 간단하다. 10월 말날의 외양간기원, 10월의 풍속으로 성주 고사, 손돌바람(孫乭風), 김장담그기, 20여종의 시절음식, 보은 곡리산꼭대기 大自在天王祀堂(대자재천왕사당)의 제사기록이 있다. 11월 冬至(동지)의 팥죽, 관상감의 달력나누기, 내의원의 煎藥(전약)진상, 제주도의 귤진상과 임시과거인 柑製(감제), 충청도, 경상도의 용갈이점(龍耕占,용경점)각지방의 생선종류와 음식의 종류, 김치의 종류들의 시절음식, 등이 기록되어 있다. 12월 臘日(납일) 의 종묘사직제(宗廟社禝祭) 내의원에서 淸心丸(청심환)등 각종 丸藥을 만든 臘藥(납약)진상과 그것을 나누어 주는 일, 臘亨(납형)에 쓰는 고기의 들짐승사냥 이야기, 찬새잡이, 除夕(제석)의 묵은 세배, 대궐안에서의 年終砲(년종포), 년말의 소 도살 임시해금, 守歲, 눈섭희여졋다고 분칠하는 작낭놀이 이야기,윷놀이설명과 윷점, 널뛰기, 함경도,평안도의 圓柱(원주)에 기름심지를 박은듯 하다는 氷燈풍속, 의주의 紙砲풍속등이 기록 되어 있다. 기타 12월풍속으로 관리들의 성적과 등급조절자료가 작성되어 제출되는 歲抄(세초)풍속, 각급 지방장관들의 년말 진상, 蹴鞠(축국), 고성군사당의 가면놀이 등이 있다. 윤달풍속으로는, 因衣(인의, 혼의, 수의등)만들기, 광주(경기도) 봉은사 노파들의 기원왕생 기원등의 기록이 있다. (자세한 것을 알고 싶다면, 신역동국세시기, 최대림역해, 홍신문화사 신서 36, 1992), 동서의, 경도자비, 열양세시기 참조).

朝鮮시대 민속전반적인 경향은 性理學(성리학)의 전래에 의하여 전통적인 민속들이 儒敎(유교)중심의 세계관에 입각한 儒敎문화로 변모한데서 찾을 수 있다. 高麗말 性理學 이 전래되어 拂敎에 대한 배척의식이 싹트다가, 儒敎세력에 의하여 朝鮮이 건국되면서 무속, 도교, 불교등 전통적인 신앙에 관련 된 민속과 문화일반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어났다. 寺社革罷(사사혁파)와 淫祀(음사)의 타파등을 통하여 옛질서를 청산하고 儒敎적인 정치이념을 구현하여, 새로운 체제의 국가를 수립 하자고 하였던 것이다. 이에따라 八關會등 전통적인 국중대회가중단되고, 中國에서 들어온 儺禮會(나례회)가 새로운 풍속으로 자리잡기 시작하였고, 이와 더부러 中國의 城皇祭(성황제)라는 명칭이 高麗이래로 전통적인우리의 洞祭(동제)를 대신하기에 이르 렀다. 따라서 儺禮都監官(나례도감관)

등 이를 관장하는 정부기관까지 생겨 났다. 祭儀의 방식도 크게 바뀌었다. 술을 마시며 노래와 춤을 즐기며 가무사제하던 축제형식이 祭儀에서 엄숙한 儒敎형식의 제사의식으로 달라 졌다. 특히, 널리보급 된것은 조상에대한 제사 였다. 제사는 高麗말기 부터 朝鮮 明宗전까지도 영의정도 4대봉사를 못 하였는데 朝鮮 후기에 와서는 일반들까지 4대봉사가 일반화 되었다. 이로서, 제사는 본고장인 中國에서 보다 더 강화 되었다. 高麗시대에 강성했던 행사들은  昭格署(소격서)라는 관청을 두어 대폭 줄였다.  巫俗(무속)은

淫祀로 규정되어 타파의 대상이 되었고 巫堂은 八賤(팔천)으로취급되어 일정한 지역에 수용하거나, 活人署(활인서)에 소속시켜 질병치료에 이용 하였다. 朝鮮의 儒敎문화는 中國중심의 사대주의에 빠지는 한편, 혈연중심의 가족주의와 문벌을 형성하게 되었고, 학문과 도덕을 중시하는 인문정신이 강성하게 되었다. 그결과 士農工商(사농공상)의 가치관이 형성 되었으며, 양반은 생활활동에 참여하는것을 금지시키여 비생산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실질보다 명분을 앞세우고 경전의 문구나 외우면서 족보의 반상이나 따지는 페단을 낳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반상, 관민, 적서, 남녀의 차별관념이 깊이 조성되고, 당쟁의 과열 및 문벌다툼으로 민족의식이 분열되고 국력이 약화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대한 반작용으로 등장한 것이 실학사상이다. 中國중심의 모화사상에서 탈피하여 민족고유의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키려는 의식이 민속에 대한 관심으로 새롭게 불러 이르키게 되었다. 이러한 실학파의 민족적각성은 민족문화에 대한 재 인식을 가능하게 하였으나, 性理學에 의하여 단절되거나 변질된 민속을 복원하는 데 까지는 이르지 못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實學派(실학파)의 민속에대한 자각과 학문적관심도 일제시대로 접어 들면서 계속해서 활성화 될수 없게 되었다. 일제에 의하여 민족문화가 다각적으로 말살 되었기 때문이다.

5. 日帝强占期(일제 강점기),

  朝鮮시대 性理學이 우리 민속을 변절시킨뒤, 또한고비의 훼손은 개항기부터 시작된다. 개항기에 들어 온 기독교는 종교적인 선교활동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 전통문화를 미개한것으로 비판하면서 서구문물을 들여와 소개하고 보급하는데 상당한 노력을 하였다. 이들은 儒敎적인 제사도 조상숭배가 아니라 우상을 섬기는 것이라 금기시 하였으니, 무속을 비롯한 洞祭, 기우제등의 민속신앙은 미신으로 취급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선교활동의 일환이었기 때문에 민속의 급격한 파괴나 강압적인 힘으로 단절시키는 사례는 없었다. 일제시대에 들어 오면서 민속문화 훼손 및 단절은 극도에 달 한다. 식민정책을 위하여 우리 민족정신을 말살하고자 민속문화를 물리적으로 훼손하기 시작 하였다. 그들은 우리민속을 "개화"라는 제국주의적 용어를 통하여 극복해야 할 문화를 매도하는 한편, 민속신앙을 미신으로 규정하며 타파의 대상으로 삼았다. 일제에 의하여 집중적으로 훼손된것은 家神과 洞神을 중심으로 한 민속신앙과 지역공동체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대단위 민속놀이 였다. 민속놀이는 대중집회를 금지하는 명목으로, 민중들이 집단적인 놀이를 통하여 결속하고 미족적동일성을 강화하는 것을 우려하여 법령으로 금지 하였다. 민속신앙의 탄압과 박해는 더욱 극심 하였다. 경찰국에서는 "무녀취체법규"를 제정하여 강력한 행정으로 巫俗을 억눌러서 못하게 하고, 학무국에서는 "神道(신도)정책"을 펴 나가 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의무화 시켰고, 사회과에서는 민속신앙을 미신으로 간주하는 사회운동을 전개 하였다. 그 결과 집안의 "성주, 조왕, 삼신"등의 家神들을 수색하여 불사르고 마을의 당집과 당나무를 훼손하여 洞祭를 중단 시켰다. 그리고는 자신들의 민속신앙인 神道를 들여 와 朝鮮신궁을 비롯한 여러 신궁과 신사를 각처에 짖고, 매월 1일을 "애국일"로 정하여 신사참배를 의무화 시켰다. 이에따라 집집마다 신단이 모셔지기도 했다.양력을 사용하게 됨으로서 세시풍속도 크게 변모시켰다. 전통적인 설을 양력에 의하여 신정으로 대치시키자 하였으며, 우리의 년호대신 日本의 년호를 썼다. 뿐만아니라, 설, 보름, 단오, 추석등 3일 또는 5일간 놀았던 큰명절들이 하루도 공휴일로 지정되지 않았다. 일제에의하여 우리의 유형적인 민속도 크게 달라 졌다. 달발령에 의하여 길게 땋아내리던 머리를 짧게 깍게 되었고, 관리들과 경찰관들의 국민복이 서구의 신사복과 함께 새로운 복식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양복의 영향으로 남성들의 한복에는 "쪼끼"라는 새로운 양식의 복식이 덧 붙이게 되었다. 쪼끼의 출현으로 허리춤에 차고 다니던주머니 대신에 이른바 개화주머니가 유행 하엿다. 그라고 여성들의 복식에는 이른바 "몸뻬"라는 바지형식의 노동복이 생겨 났다. 이것은 일제가 우리 부녀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보급한 여성노동복이다(이것은 약간의 지나친 해석이 아닌가 의심이 간다, 글 옮긴자의 변) 거기에다 日本식 신발이 들어온 것도 이때부터이다. 가옥의 양식도 그들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미닫이문이 늘어났고 방바닥에 다다미가 깔리기도 했다. 철도관사를 비롯한 공공건물 여기에 딸린 관사들은 모두 일본식 가옥이었다. 이처럼 일제의 식민정책과 日本을 통하여 들어온 서구문화의 영향으로 우리민속은 크게 변질 되었다. 광복후에도 일제의 잔재가 민속문화 여러모로 남아 있다.시급히 극복해야 할 잔재로는 우리의 민속신앙을 미신으로 매도하는 관념과 아직도 남아 있는 日本語의 찌꺼기, 그리고 전통적인 설을 신정으로 대치시켜 놓은것등을 들수 있다.

X
Login

브라우저를 닫더라도 로그인이 계속 유지될 수 있습니다. 로그인 유지 기능을 사용할 경우 다음 접속부터는 로그인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 게임방, 학교 등 공공장소에서 이용 시 개인정보가 유출될 수 있으니 꼭 로그아웃을 해주세요.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