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문헌에 나타난 민속극,

   (1). 처용무(處容歌舞). 먼저 이 계시물을 보시라. https://youtu.be/012cnPufF3M

     "三國遺事" 에서의 "처용랑망해사(처용랑망해사)" 의 지료는 여러가지 다양한 해석을 자아냈으나, 그 핵심적인 성격은 굿 또는 연극에 나타난 사실의 기록이다. 동해룡(東海龍), 處容(처용), 南山神(남산신), 北岳神(북악신), 地神(지신)등의 신격(神格)등이 나와서 춤을 추었다는 것은 사람이 그 춤을 추었다는 말 이다. 그리고 춤을 추는 사람 모두는 가면을 썻다는 것이다. 憲康王(헌강왕, 新羅의마즈막王)이 南山神의 가면을 쓰고 南山神의 춤을 추었다는 사실은 이러한 사정을 이해하는데 소중한 단서가 된다. 기록의 문면은 憲康王때 있었던 일을 전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神格의 가면을 쓰고 춤을 추는 굿은, 그 전부터 있었을 것이고, 오랜동안 국가적인 행사로는 행하지 않던 굿을 憲康王때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부활시킨것 같다. 특별한 이유란, 그때, 사방에서 반란이 일어나며 後三國時代(후삼국시대)의 시작을  예고하는  위기가 생긴 것이다. 憲康王은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나라를 지키는 호국신들의 굿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굿을 하면서 지방을 순시 했던 것이다. 그런데 處容은 신격으로서도 특이한 존재 였다. 다른 신들은 원래부터 있었고 호국신인데, 處容은 憲康王이 開雲浦(개운포)에서 데리고 와서 보좌왕정을 맡긴 신참자인것 같다. 신참자이면서 특히 중요한 구실을 했는데, 疫神(역신)을 물리친 것은 다른 神에게서는 보이지 않는 보좌왕정의 구체적인 실천이기 때문이다. 疫神은 질병의 신이면서 또한 국가적 재앙의 상징인데, 국가적 재앙을 물리치면서 나라를 평안하게 하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굿의 방식은 싸움만은 아니다. 處容과 아내는 혼인을 했고, 아내를 범한 疫神을 물리치는 과정에 혼인과 싸움이 복합되어 있으며, 혼인과의 싸움은 굿으로서의 의미를 지니는데 그치지않고 극(劇)으로서의 의미도 갖이고 있게 된다. 處容이 아내를 빼았겨 고민하는 좌절의 감정은, 處容은 疫神이 무서워하는 능력을 갖이고 있다는 측면에서 만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다. 處容이 憲康王을 따라 開雲浦(개운포)에서 서라벌로 갔다는 것은 원래 開雲浦에서 공연되던 處容歌舞(처용가무)가  憲康王의 주선으로 서라벌에서도 공연되었다는 뜻으로도 해석 된다. 憲康王은 處容굿에 대단한 기대를 걸었을 것이다. 그러나 굿으로서의 효과는 실제로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나라의 위기를 극복할수 없었고, 그 대신에 劇으로서의 의미가 더욱 뚜렷하게 부각되었다고 할수 있겠다. 處容歌舞가 굿에서 劇으로 발전한 것은 이미 開雲浦에서 있었던 일이라 생각되며, 이미 병(病)든 도성인 서라벌은 處容劇의 주제가 패배와 좌절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다가 가도록 하기는 했어도, 處容劇이 劇으로서 계속적인 발전을 하게 할만한 여건은 갖추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후 高麗의 궁중놀이로, 다시 朝鮮의 궁중놀이로 계승된 處容歌舞는 劇으로서의 의미가 도리혀 퇴화 되었는데, 그렇게 될수 밖에 없었던 시초가 이미 憲康王 때에 마련 되었다고 할수 있겠다. 그렇다고 해서 處容劇이 연극사의 줄거리와 연결되지 않는 예외적인 존재라는 말은 아니다. 開雲浦와 같은 지방에서 계속 전승되는 處容劇은 서라벌에서의 변질 또는 高麗이후의 퇴화에도 불구 하고, 강열한 대결정신을 갖인 연극으로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엇을 것이고, 문헌기록을 통해서는 확인 되지는 않지만, 후대의 탈춤으로 계승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處容劇과 후대의 탈춤은 또한 중요한 차이점도 있다. 處容劇은 귀족이 출연하는 연극이고 좌절된 상황에서 적대자와 대결하는 비극적성향의 연극이었다고도 할수 있는데, 후대의 탈춤은 민중의 희극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處容이라는 연극을 본것은 1953년(피난시) 釜山(부산), 南浦洞(남포동)에 있는 부산극장에서 新協이라는 국립극단의 공연이었다. 당시 나느 고2였고전시였음에도 연극인들의 열정이 있어서 공연 되었던 것인데, 處容역을 맡았던 김동원씨의 낭낭한 목소리로 " 서벌 밝기 달에 밤드리 노니다가 들어와 자리보니 가로히 네희여라 둘은 내해로되 둘은 뉘해런고 본디 내해인데 앗아 날 어찌 하리" 라고 노래하던 씨의 處容歌가 아직도 내귀에 쟁쟁하다. 부언할것은 내가다닌 경복은 참 멋진 학교였다. 우리는 좋은 국어선생님을 맞나 중 1때부터 국립극단 신협이 공연하는 연극은 빠짐없이 보았다. 사육신, 별은 내가슴에등등 물론 주연배우는 김동원씨 이해랑씨, 백성희씨 등, 음악공연의 참석도 선생님들의 돌봄에서 그랬었다. 인생길에 도움을 준 모교에 감사 한다. 이야기가 크게 비껴 나갔다. 먼저의 민속극 이야기로 돌아가자. 

(2). 五伎(5기'재주伎').

   "三國史記(삼국사기)" "樂志(악지)"에 五伎(오기)를 읊은 新羅의 崔致遠의 詩(시)가 

전 한다. 五音(오음)중,

其 一, 金丸(금환); 몬돌리고 팔휘둘러 金丸을 희롱하니 달 구르듯 별 뜬듯 눈에 가득 하          네, 좋은 친구 있은들 이보다 좋으리, 넓은 바다 파도 그침을 알겠네. 

其二, 月顚(월전, 이마顚); 어깨높고 목은 줄어 다리꼭지 우뚞한데 팔걷은 선비들 술잔으         로 싸우네,노랫소리 듣고 저마다웃는데 저녁깃발 새벽을 재촉하네.

其三, 大面(대면); 황금빛 얼골 그사람 구슬채찍 손에 쥐고 귀신 부리네, 조용히 빠른걸           음  우아한 춤을 추니 붉은 봉황 堯(요)봄을 추누나.

其四, 束毒(속독); 더벅머리 남빛 얼골의 기이한 인간들, 떼를지어 뜰에 와난새춤을 배우         네. 북소리는 둥둥 바람은 쏠쏠한데남으로 달리고 북으로뛰어 끝이 없구나.

其五, 狻麑(산예, 사자산사자예); 사막 일만리 먼길을 건너 오자니 털옷은 혜지고먼지 끼         었네, 인덕에 길들인 머리와 꼬리 백가지 짐승 재주와 어이 같으랴.

五伎는 모두 七言節句(칠언절구)의 짧은 詩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알 스가 없다. 금환, 월전, 대면, 속독 산예로 정리되는 五伎는 통일신라의 歌舞百戱(가무백희)를 가장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기록이다. 이것은 崔致遠의 鄕樂雜詠(향악잡영)의 기록이 金富軾의 三國史記에 인용됨으로서 알려 졌다. 金丸(금환)은, 금빛공을 놀리는 것이고, 月顚(월전)은 어깨는 놉고 목이 잛고(꼽추) 머리털은 오뚝한 광대가 선비들이 술잔을 다투는 우수꽝스런 광경을 보여주는 것이고, 大面(대면)은 금빛가면을 쓰고 귀신을 쫒차 내는 것이고, 곡예의 일종. 束毒(속독)은 쑥대머리와 파란 얼굴을 한 광대가 나와서 춤을 추는 것이고,일종의 가면극서역의 촉특국에서 전래된 건무의 일종 狻麑(산예)는 사자가 춤을 추며 재주를 부리는 것이다. 서역전래의 사자춤. 이 五伎는 흔히 中國을 거쳐서 들어 온 서역계통의 놀이라고 한다. 月顚과 束毒은 그 명칭이 서역(西域)에 있었던 나라 이름과 유사하고, 또한 등장하는 광대가 특이하다는 것에 서역에서 전래된 증거라 하겠다. 사자춤인 狻麑(산예)는 사자가 없는 한국에서 생겨 났을 수 없고, 역시 서역쪽에서 전래된 것일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우선 崔致遠의 詩제목과 어긋 난다. 詩제목은 "鄕樂雜詠五首(향악잡영오수)" 라고 하여 "鄕樂"이라 밝힌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月顚(월전)과 束毒(속독)은 아직 해독 되지  않은 新羅語(신라어)일 수 있고, 廣大(광대)의 모습이 특이 하다는 것은 그러한 가면을 썻다는 말 이다. 사자춤은 외래의 것이 틀림 없으나, 사자 아닌 다른 동물의 춤이 어느 시기에 사자춤으로 바뀌었을 수도 있다. 金丸(금환)은 곡예임으로 연극은 아니다. 大面(대면)과 狻麑(산예)는 가면을 쓰거나 동물의 춤을 추면서 잡귀를 몰아 내는 굿이라 할수 있고, 연극으로서의 의미는 짐작하기 어렵다. 여기서 연극이라 볼수 있는 것은, 月顚월전)과 束毒(속독)이다 그런데 束毒(속독)은 광대의 모습만 묘사 해 놓았기 때문에 극적 의미가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 月顚(월전) 만은 내용이 나타 나 있다. 선비라는 사람들이 술잔따위를 가지고 다투는 것은 선비로서의 위엄을 파괴하는 희극이다. 어깨는 높고, 목은 짧고, 머리털은 오뚝하다는 광대의 모습은 희극적인 효가를 더욱 분명하게 한다. 五伎는 다섯가지 묘기를 연속해서 보여주는 구상을 갖추었을 것 같은데, 이러한 구성법은 후대 탈춤이 서로 독립된 내용이 몇개과장으로 이루어 진 것과 상통하고, 특히, 五廣大(오광대)가 다섯과장으로 이루어 져 있다는 점에서 五伎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추정 되기도 한다. 金丸(금환)이 밤마리 五廣大 서두에 있었다는 죽방을 받기로 계승되었을 수도 있다. 五廣大의 마즈막 과장에서 흔히 "포수탈"이라고 하는 동물춤이 잇어서 山藝(산에)를 연상케 한다.그러나 五伎와 털춤의 관련중에서도 특히 주목 할 것은 바로 月顚(월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은 선비들이 서로 다투며 스스로의 위엄을 파괴하는 희극이 여러 탈춤에서 보인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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