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민속예술, 민속극,

2022.12.14 11:51

김일하 조회 수:8

(3). 소학지회(笑謔之會).

   笑謔之會는 규식지희(規式之戱) 음악과 함께 산대희(散大戱)를 이루기도 하고 散大戱를 떠나서도 공연되던 단편적인 희극(戱劇)이기도 하다. 여기서 규식지희라고 하는 것은 朝鮮시대에 국가적인 행사나 외국사신등을 영접할때 행사하던 놀이를 통틀어 일컷든 말, 청령(淸鈴), 弄환(롱환)으로 불리는 방울놀이, 답색(踏索), 보색(步索)으로 불리우는 줄타기, 장우희(長芋戱)로 불리우는 땅재주, 토화(吐火)로불린 불놀이, 어룡지희(魚龍之戱), 무동(舞童)등이 이에 속한다. 오늘날 사당태(寺堂覇)가 일부를 소유하고 있고, 풍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산대희(山臺戱) 역시 우리나라의 대표행사로서, 거대한 산모양의 구조물을 가추어 놓고, 위와 아래에서 가무백희(歌舞百戱)를 하는데 이른바 山臺戱. 전설에 의하면 東海逢來(동해봉래), 방장(方丈), 영주(瀛州) 라는 삼신산(三神山)이 있고 이를 큰거북이가 떠 바치고 있다고 하는데 , 나라가 태평하면 이 거북이가 춤을 춘다고 한다. 山臺戱는 그러한 태평성대에 춤을 춘다고 하는 거북이를 현실화 한 것이다. 따라서 전통사회에서는 국내에 큰 경사가 있거나, 외국사신이 올때는 이러한 山臺戱를  베풀어 당시가 말 그대로 태평성대임을 구가하고 자 했다. 山臺戱는 新羅 眞興王(진흥왕)때 부터 이루어 진 것으로 되어 있다. 팔관회(八關會)를 이른다. 笑謔之戱(소학지희)라는 말은 그 뜻과 같이 웃음과 해학의 놀이 인 연극이다. 공연자는 廣大(광대), 창우(倡優), 우인(優人)등으로 불렸는데, 이들은 1년중 일정한 기간에는 나라에서 하는 놀이에 의무적으로 동원되고, 그렇지 않은 기간에는 재주를 팔아서 먹고 살거나 걸식마저 해야하는 처지였다. 笑謔之戱者(소학지희자)들은 동원의 대상이 되거나 재주를 팔아서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듣는 사람들의 구미를 마추는데 그치지 않고 , 지기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면서, 사회를 풍자 했다. 笑謔之戱는 가면을 쓰거나 인형을 사용하지 않고 사람이 직접 나서서 하는 연극이고, 倡劇(광데창극)이 아닌 話劇(말할화극)이다. 광대 한사람이 자문자답하는 경우가 흔하고, 내용은 대부분 즉흔적인 것이며, 시사지사(時事之事)를 풍자 한것이 가장 중요한 주제이다. 朝鮮시대의 산대라희(山臺儺戱)에서 주목 할 것은 위에서 살펴본 規式之戱와 歌舞분 아니라 雜戱(잡희), 倡優之戱또는 배우희(排優戱)라고 불리는 笑謔之戱의 활극전의 전개인 것이다. 高麗의 조희(調戱, 元나라의 희곡을 본딴듯,편자주)이래로 직접 배우에 의해 행해진 여러가지 笑謔之戱가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과 기타 문헌에 보인다. 世宗(세종) 10년(1464)12월, 나례(儺禮)때에 축역우인(逐疫優人)이 있어 雜戱로서 스스로 문답하며 탐관오리와 항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꺼리낌 없이 연출 하였다. 또 世祖(세조) 4년 5월에는 본시 優人이었던 治匠高龍(치장고룡)이 맹인취지상(盲人醉之狀)을 잘 놀았다고 한다. (이것은 아마도 京劇 (BEIJING OPERA)에서의 양귀비의 취상극의 모방이 아니었을까 해 본다.편자주) 燕山君(연산군) 5년(1499) 12월에는 孔殘(공잔) 이라는 배우가 儺禮 때에 李伸(이신)의 심농시를 읽고 삼강령팔조목(三綱領八條目)을 논 했는데 무례하다고 하며 杖(장)60을 하고 역졸(驛卒)에 속하게 했다고 한다. 또 연산군 11년(1505) 12월에는 孔吉(공길)이라고 하는 배우가 이상적인 군주는 맞나기 어렵지만 훌륭한 신하는 언제던지 있게 마련이라는 내용으로 笑謔之戱를 버리다가 매를 맞고 귀양을 갔다. 그 내용은 이렇다. " 천하를 堯(요), 舜(순)과 같은 임금으로 친다면, 저는 고도(皐陶)와 같은 신하인데 堯舜은 항상 있는것은 아니지만 皐陶는 언제나 있을 수 있습니다. 라 하였다. 또 論語(논어) 三綱領八條目(삼강령팔조목)을 외어 말 하기를, 임금이 임금답고, 신하가 신하답고, 아버지가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 다워야 합니다.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면 설사 쌀이 있은들 제가 먹을 수 있겠습니까" 라 하였다. 中宗(증종)22년(1528) 12월 儺禮 때, 正才人(정재인)으로 하여금 민간질고(民間疾苦)와 구황절차(救荒節次)를 놀이로서 연출케 한 사실도 보인다. 또 中宗때, 魚叔權(어숙권)의 "稗官雜記(패관잡기)"에는 定平府使(정평부사) 의 "말안장구입노이" 와 "巫稅布(무세포) 놀이"가 소개 되었다. 먼저 定平府使 具世彰은 탐욕이 심하여 말안장 장수를 불러드려, 여러날을 두고 값을 깍고 흥정을 하다가 미침내 관비로 말안장을 구입 하였다. 그 모양을 배우가 歲時御前(세시어전)에서 놀이로 놀아, 王이 정평부사를 복죄(伏罪)로 다스리게 되었다. 다음은 巫稅布에 관한 것인데, 관부에서 거둬드리는 巫稅布가 너무 심하여 매번 수세사가 오면 巫家에서는 술과 음식을 대접하며 그 기한을 늦추려고 야단법석을 떠는 모습을 배우가 歲時御前 놀이에서 보여주어 王이 무세로 면제하여 주었다는 이야기 이다. 이러한 놀이들은 모두 사회비판을 보여주는 놀이들 인데, 魚叔權(어숙권)은

"배우도 능히 탐오를 탄핵한다" 또 "배우도 백성에게 도움이 된다"라 평하고 있다. 이와 비슷한 사회풍자 놀이는 필자미상의 "藝陽漫錄(예양만록)" 에도 있다. 明宗(명종)22년(1567)에 우울한 일로, 王이 倡優戱(창우희)를 구경하게 되는데, 배우가 都目政事(도목정사)즉 벼슬아치의 성적을 평가하여, 벼슬을 떼어 버리던가 승진을 시키는  일을 놀이로 보여 주었다. 내용은, 이조판서와 병조판서가 서로 못난조카와 사위에게 정실을 쓰는 내력을 연출 하여서 우울 했던 王이 크게 웃었다고 했다. 또 "정호사설'에 막 등과한자들이 倡優를 시켜 놀이를 하였는데, 다 떨어진 의관을 한 선비가 온갖 추태를 연출하며 자신들의 등관 축하연의 즐거움으로 삼았다고 하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전승 된 놀이 일 가능성이 크다. 倡優戱란, 광대 하사람이 고수의 북장단에 마추어 서사적인 이야기를 소리와 아니리로 엮어 발림을 곁들이며, 구연(口演)하는 우리 고유의 民俗樂(민속악) 또는 劇(극) 이다. 이러한 직업 배우들이 三日遊街(삼일유가)에도 고용되어 老儒戱(노유희)를 하였고, 설날같은 명절에는 상경하여 궁궐에서 선비들의 생활을 풍자하는 놀이를 했다. 老儒戱와 같은 독연형태의 놀이는 그뒤 다수의 등장 인물에 의하여 사회비판이나 시사풍자의 내용을 담은 연희로 성장 하였다. 당시의 배우들은 설날과 같은 명절에만 또는 유사시에만 상경, 궁궐에 출입하며 위와같은 놀이를 했고, 평시에는 떼를지어 전국을 순회 하였다. 이로인하여, 그들은 많은 사회적 모순을 보고 들을 수 있었고, 그와같은 견문을 통하여 老儒戱, 巫稅布와 같은 놀이로 연극을 창출 해 낼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같은 사회풍자놀음은 高麗시대의 調戱(조희)의 전통을 이어 받은 것으로, 笑謔之戱의 활극적인 전개를 통하여 朝鮮후기의 山臺太監(산대태감) 계통극의 형성에 맥이 닿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줄타기를 하는 광대가 하는 재담도 笑謔之戱의 뒤를 이은것으로 간주 된다. 오늘날의 만담(漫談)하는 이들이 笑謔之戱에 남아 있다. 笑謔之戱는 탈품의 사설로 바뀐것도 아니고, 판소리의 사설의 기원을 이룬것도 아니라는 것도 말하고 싶다. 그것들은, 그 자체로서의 계보를 갖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비를 풍자하는 주제는 新羅시대의 月顚(월전)에서 시작하여 朝鮮초기의 笑謔之戱로 이어졌고 탈춤에서더욱 분명하게 나타난 우리연극의 줄기찬 전통이었다는 것을 말 하고 싶다.

X
Login

브라우저를 닫더라도 로그인이 계속 유지될 수 있습니다. 로그인 유지 기능을 사용할 경우 다음 접속부터는 로그인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 게임방, 학교 등 공공장소에서 이용 시 개인정보가 유출될 수 있으니 꼭 로그아웃을 해주세요.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