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구전자료(口傳資料)로 전(傳)하는 민속극(民俗劇),

 (1). 무당(巫堂) 굿 놀이, 먼저 이영상을 보자. https://youtu.be/iXrLdrSCMGI

    巫堂 굿 놀이, 또는 무극(巫劇)은 巫堂이 하는 굿 중에서 연극이라고 할만한 것을 이른다. 巫堂이 굿을 하면서 부르는 노래나, 말하는 사설을 모두 무가(巫歌)라는 명칭으로 지칭하는데, 巫歌를 문학쟝르로 구분하여, 사설(辭說), 교술(狡術), 시사(時事), 희곡(戱曲)이 두루 발견 된다. 서정무가(敍情巫歌)나 교술무가(狡術巫歌)는 신(神)을 맞이해서 神이 사람에게 하는 말이나 사람이 神에게 하는 말을 나타내는데 쓰이고, 서정무가(敍情巫歌)는 神의 내력을 풀이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며, 희곡무가(戱曲巫歌) 또는 巫堂 굿 놀이는 神을 즐겁게 하는 놀이 부분에 등장(뒷풀이) 하게 된다. 神도 놀아야만 줄길수 있어서 이다. 그렇기 때문에 神의 구실을 하는 巫堂은 나서서 춤추고, 노래를 부르며, 말을 한다. 神이라 하더라도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것을 털어 놓아야 한다. 그런데 神은 사람과 같은 성격을 갖이고 있으며, 사람과 같은 감정으로 세계사에 부딪치므로 연극이 성립 된다. 노래와 말로서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갈등을 나타 내게 되면서, 神이 등장한 굿은 구실에 그치고, 실제로는 사람이 등장하는 연극이 벌어 지는 것이다. 굿 보는 사람들도 굿의 효과를 기대하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연극이 재미 있기 때문에 몰려들고 흥겨워 하게 된다. 이렇게 되서 , 巫堂 굿 놀이는 연극적 국문학적 차원에서 주목을 받는다. 巫劇의 출연자들은 가면같은것을 쓰지 않는다, (제주(濟州)의 입춘(立春) 굿이나, 영감놀이에는 가면이 사용되지만 이것은 일괄적인 현상이 아니다) 설정된 인물의 성격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수단은 머리에 쓰는 것이나, 옷 이다. 남자巫堂이 머리에 수건을 쓰고 치마를 입고서 여자로 분장하는 것은 흔히 볼수 있다. 주인공 한사람은 (巫堂) 실감이 나도록 잘 꾸미고, 상대역은 필요에 따라서 관객중에서도 등용하거나, 주인공하는 巫堂이

1인2역으로 처리하는 것이 예사 이다. 주인공은 해설자의 구실까지 하면서 자문자답으로 다른 인물과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전개하는 것이다. 해설자가 있다는 것은 서사적인 특징이기 때문에 이는 분명 연극임에는 틀림이 없다.(비록 해설자가 제3자가 아닌 당사자라 하더라도) 평안도(平安道)의 제석(祭釋)방아놀이(儒戱,,유희), 제주도(濟州道)의 세경놀이, 경상도(慶尙道)의 범굿, 골매기할매거리 같은 것이 巫劇의 대표적인 예이다. 제석방아놀이는 농사가 잘되어 거둬들이는 장면을 보여주는 추수감사 굿이고, 세경놀이는 제주도 巫俗에서 받드는 농사의 神인 세경을 위하여 거행하는 굿이고, 여기서는, 여자가 임신하고, 아이를 낳고, 나은 아이가 잘 자라서 농사를 지어서 많은 곡식을 거두어 들이는 과정을 묘사하며 농사가 잘 되도록 하자는 내용이다. 범굿은 포수가 범을 잡는 광경을 통해서 자연적인 재앙을 물리치자는 굿, 골매기할매거리는 마을의 수호신인 골매기할매가 나와서 마음껏 놀게하여 마음을 편하게 해 주려는 굿 이다. 골매기할매로 선정된 인물은 시골노파이고, 자기는 잘나지도 않았으면서 며느리 흉보는 것을 일 삼는다(崔正如, 徐大錫동해안무가, 형성출판사). 그래서 며느리의 흉을 야단스럽게 들추어 낼수록 며느리에 대한 시어머니의 특권이 터무니 없는 것이라는 편견을 관중들에게 알려 준다. 관중은 이점을 발견하면서 쾌감을 느끼게 된다. 골매기할매거리와 같이 공연되는 과거거리에서는 글 공부나 과거급제, 선비의 위엄이나 벼슬같은 것들을 웃음거리로 만든다. 그로므로서, 사회를 비판하고 경화되어 있는 관념을 뒤집어 엎는 것이다. 그러나 비판의 방법은 신랄한 방법이 아니고, 오히려 부드러운 해학(咍謔)이다. 巫堂은 꼭두각시놀음이나, 탈춤의 공연자가 가지는 것과 같은 강열한 비판정신은 갖고 있지 않다. 우리들의 巫堂 굿놀이는 일상생활에 밀착되어 있음으로 세태를 민감하게 반영 한다. 오늘날 볼수 있는 무당굿놀이 에는 개화이후의 세태를 나타내는 말도 적지 않게 들어 있다. 꼭두각시나 탈춤 보다는 민감한 변화를 보인다고 할수 있갰다. 그럼에도, 무당굿놀이는 굿의 일부로 만 공연 된다는 점에서 연극으로서의 발전에 한계가 있고 포용할수 있는 관객이나, 다룰수 있는 주제에서 적극적인 자세를 취할수 있게도 안 된다. 연극사의 주류에서는 밀려날수 밖에 없는 약점이라 할수 있겠다. 

(2). 巫堂 굿놀이 연행방식과 특징.

  巫堂 굿 놀이는 연극적, 국문학적 차원에서 주목을 받았다. 전통사회에서 저문적 공연집단인 광대(廣大)나, 기생(妓生)을 부를수 있었던 상층계급과는 달리 대다수의 서민들은 굿을 통해 공연욕구를 충족 할 수 밖에 없었다. 전통사회의 무당들은 굿의 놀이적 요소와 외부의 놀이들을 굿속에 끌어드려 서민을 위한 공연거리를 마련 했다. 巫堂 굿놀이는 종교적 맥락을 떠나서 하나의 연극적 공연물로서 가능 했다. 巫堂 굿놀이를 통하여 의례에서 놀이로 전개되는 과정을 알수 있다. 立春 굿놀이, 세경(歲慶) 굿놀이, 소놀이 굿, 방아노리 굿등의 巫堂 굿놀이는 농경을 기반으로 한 사회에서 풍농을 기원하는 놀이적 의례이 었고, 거리 굿이나, 뒷전 은 잡귀잡신(雜鬼雜神), 즉 무주상귀(無住狀鬼,떠돌이귀신)을 위로하고, 돌려보내는 굿이 었다. 잡귀잡신들이 인간들에게 질병이나 재앙을 가져 온다고 인식 했기 때문에 신격(神格)이 낮은 잡神에 대한 굿놀이를 만들어 낸 것이다. 巫堂 굿 놀이는 儒敎(유교)의 여제(勵齊)와 佛敎(불교)의 수륙제(水陸齊)와도 일맥상통 한다. 여제의 대상인 여귀는 저승에 가지 못하고 이승을 떠도는 잡귀들로서, 마을의 역질(疫疾)이나 재난을 막아 내고자 했다. 佛敎의 수륙제와도 일맥상통한다. 여제의 대상인 여귀는 저승에 가지 못 하고 이승을 떠도는 잡귀들로 , 미혼남녀의 귀신이나, 자손없이 떠난 귀신등 여러가지 들, 여러가지 사정으로 인해 제시(祭祀)를 받을 수 없는 귀신, 즉 무사귀신(無祀鬼神)을 말 한다. 朝鮮시대에는 국가와 민간에서 여제를 지냄으로서 마을의 역질이나 재난을 막아 내고자 했다. 불교의 수륙제도 여제와 동일한 목적에서 거행 되었다. 여제와 수륙제에서 잡귀잡신을 호명 하면서 제를 지내는 것에 비해, 巫堂 굿놀이에서는 잡귀잡신으로 분장하여 형상화 시킨것이 더욱 강한 인상을 주었다. 가면극을 비롯한 대부분의 전통연희는 무형문화재(無形文化財)지정이후 전승력이 약화되고 박제화 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현장성과 전통력이 살아 잇는 巫堂 굿 놀이는 연행될 때 마다 변모되며 새로운 의미를 부여 받는다. 巫堂이 사회적 변화에 대응하고 현장상황에 잘 적응하기 때문이다. 巫堂 굿 놀이에는, 샤마니즘의 요소를 바탕으로 神의 모방과 성적결합등 풍요, 재액, 놀이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巫堂 굿 놀이는 단순히 주술적 모방을 넘어 사회적 주제를 포함하고 있어서 향후 巫堂 굿  놀이는 그 의미와 지향점을 주목하여야 한다. 

(3). 굿 놀이,

  한국민속예술사전에서 굿 놀이란, 굿에서 巫女나 巫夫들이 하는 연극적인 놀이의 총칭이라 한다. 

(ㄱ). 굿,

   굿이란 무당이 굿상을 차려 제물을 神에게바치고 가무락희(歌舞樂戱)로 인간의 소망이 이루어 지기를 바라는 제의를 뜻 한다. 

(ㄴ). 굿의 역사, 

   굿의 역사는 문헌을 바탕으로 체계적으로 하기는 어렵고 몇가지 기록으로 짐작 할 뿐이다. 우리나라의 上古時代(상고시대)는 제정(祭政)일치의 사회였다. 건국서사시가 구송되어 있었고, 巫堂의 권력이 막강 했다. " 三國史記"의 "차차웅(次次雄, 新羅의 王名), 혹은 자충 이라고도 한다. 金大問(김대문)이 이르 되, 방언에 巫를 의미 한 말이니 世人(세인)은 巫堂이 귀신을 위하고, 제사를 숭상한다는 까닭으로 외경하며 마침내 존장자를 자충이라 하였다 한다" 라는 기록은 국가의 일에 巫堂이 관여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高麗시대에는 李奎報(이규보)의 "老巫編(노무편)"에서 현재 우리가 접 할수 있는 巫俗이 비교적 이른시기 부터 형성 되었음을 확인 할수 있다고 했고, 申潤福(신윤복의 풍속도 "巫女神舞(무녀신무)"에서도 굿의 양상을 확인 할수 있다. "巫堂內役(무당내역)" 에는 굿 거리별로 복식과 상차림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어 朝鮮시대 굿의 실상을 알수 있다. 21세기 현재에는 서울지역에만 한해 6만건 이상의 굿이 연행 될 정도로 굉장한 전승 양상을 보이고 있다.

(ㄷ). 굿의 형태,

    굿의 형태를 따져,개인굿과 마을굿으로 나눈다. 그 기능상 경사굿과 우환굿, 그리고 신 굿으로 나눈다. 개인굿이 개인적으로 치루는 굿이라면, 마을 굿은 마을 민들이 치루는 굿일 께다. 개인 굿에서 결사스런 굿은 사람의 명과 복을 비는 굿, 우환 굿은 병을 치료할 목적으로 행하는 치병굿, 죽은 이를 저승으로 천도하는 저승 천도굿, 특히, 저승천도 굿은 한국의 대표적인 굿으로서 진오귀 굿, 오구 굿, 새남 굿, 다리 굿, 시왕 굿, 수뢍 굿, 수망 굿, 망묵이 굿, 씻김 굿, 질딱음 굿, 시왕맞이 굿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디. 神 굿은 강신무(降神巫)와 신병을 앓다가 신을 받아 입무(入巫)하는 굿으로 내림 굿 또는 神내림 굿이라고도 불리며 세습무(世襲巫)에게는 없는 굿이다. 

(ㄹ). 기타,

   풍물을 울리는 "메굿"도 굿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으나 대개는 巫堂이 神에게 바치는 졔의(祭儀)를 가르킨다. 굿은 굿을 의뢰하는 인간과 굿을 받는 神, 중간 존재로서의

巫堂이 있어야 진행 된다. 굿은 神과 인간이 맞나는 소통의 장(場)이다. 

(참고문헌, 한국의 굿 (홍태한 외민속원, 2002)외 다수.)

(4). 무의(巫儀),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에는 12세기경 굿의 양상을 간접적으로 전해주는 한편의 장시(長詩)가 있다. 李奎報(이규보, 高麗때 사람)가 자기집 가까이에 있던 늙은 巫女가 추방당하는 것을 기뻐 하면서 지은 시 이다. 그 가운데는 굿하는 광경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ㄱ). 굿하는 장소는 신단(神檀)이 있는 방안 이다. 벽에는 畵紋(화문,巫神圖(무신도))를 걸어 놓았고 巫堂이 춤출 때는 머리가 대들보에 닿을듯한 곳이 었다.

(ㄴ). 神堂에 모신 主神(주신)은 제석신(帝釋神)이다. 그리고 벽에는 칠성신(七星神)의 巫神圖가 걸려 있고 신상(神像)들은 모두 그림으로 묘사 되어 있다.

(ㄷ). 巫堂이 굿하는 절차는 술 마시며 껑충껑충 뛰는 춤으로진행 되었다. 요란스런 장구소리에 머리끝이 대들보에 닿을듯 했다.

(ㄹ). 노래와 춤을 통해서 神이 내린 다음에는 신탁(神託)을 전하는 공수(供手)잘차가 있었다. 그 내용은 생사화복을 점치고 처방하는 일이 었다.

(ㅁ). 남녀귀신을 막논하고 많은 사람들이 굿당에 가득히 뫃여 굿을 하였으며, 그들은 금품을 巫堂에게 바치고 있었다.

이로서 高麗때의 巫堂 굿은 오늘날 볼수 있는 巫俗과 매우 비슷한 것임을 알수 있다. 또한, 이 기록은 오늘날의 巫堂 굿의 형태가 이미 12세기경에 정형화 되었음을 사실로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나타난 굿의 종류,

(ㄱ). 기복제(祈福祭).

    공동제례인 산천제(山川祭), 서낭제는 일종의 기복제, 특히 기사(祈祀)라 하며 왕가의 안녕과 다복을 산천과 서낭당 神에게 빌었다. 이것을 별사기(別祀祈)라 하며 高麗말기 부터 성행하였는데, 공양왕(公讓王)때는 國巫堂(국무당) 10여곳을 세우고 거기서 巫客들이 고취가무(鼓吹歌舞)로서 별기사제를 행 했다. 朝鮮초기때는, 송악, 백악, 감악산 등지에서 봄, 가을 로 기사제를 지냈고 또 별기은(別祈恩)이라 하여 제(祭)를 지내니 , 이것이 겹친행사가 아니냐고 예조(禮曹)가 장계를 돌린적도 있었다. 그런데 왕은 별기은은 행 해 온지 오래니 이제와서 페기함이 옳지 않다 하며 그대로 계속하게 하였다. 이러한 기복제는 왕실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사대부나 서민들도 귀신을 섬기며 巫格을 믿으며, 산천, 서낭에 제사를 지냇고, 이를 기은 또는 반행(半行)이라 했고, 이것이 민중의 기복산신제인 촌락공동제로 발전 한 것으로 보인다.

(ㄴ). 구병제(救病祭),

    예로부터 巫格이 지녔던 최대의 기능은 치병(治病)에 있었다. 고대인들에 있어서는 병은 귀신의 작용이라고 이해 되었다. 따라서 구병은 귀신과 교제하는 巫堂들만이 가능 한 것이라 하며 믿었다. 전염병은 흔히, 열병이라 하였고, 그중에서 두려운것이 천연두 였다. 이 병을 갖여오는 두신(痘神)을 특히 "마마" 또는 "손님"이라 부르고, 천연두에 걸리면 巫堂을 불러 굿을 하였다.

(ㄷ). 사령제(死靈祭),

    사람이 죽으면, 죽은이의 영을 위안하기 위하여 위령제를 지내는 법이다. 그러나 朝鮮시대의 사령제의 가장 중요한목적과 기능은 단순히 위령이 아니라 죽음의 살(煞)을 푸는 "살풀이"를 하여 령을 저승으로 보내면서 후환이 없도록 하는데 있었다.특히 병으로 죽거나, 억울하게 한(恨0을 품고 죽은 원령들은 남에게 해(害)를 갖여 온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러한 사령제는 뜰에서 행 하였기 때문에 야제(野祭)라고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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