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종군위안부들의 전후상황,

 1). 유기(내쳐졌던) 되었던 사람들,

   日本 항복 이후, 일본군 장병이나, 재류 일본인들은 거의 모두 3년이내로 인양되어 선편으로 귀향 했다. Siberia억류자들도 1950년까지는 거이 모두가 귀향 했다. 56년에는 전범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던 2689명 마저 석방되어 귀국 했다.  그런데, 위안부들의 경우, 해군은 전쟁중 44년 9월, 귀환명령을 내어, 일본인위안부를 내지로 송환 했다고 한다(重村前揭 수기). 그런데, 육군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 하고는귀환 시키지 않았다고 했다. 패전후, 상당수의 위안부가 귀환 했다는 것은, 다음 자료로 부터 알수가 있다. France령

Indochina연합군 사령관은 45년 9월7일, 지령서 제 1 호 라고 하는 문서에서," 거이 모든 일본 유녀옥 들과 더부러 위안대를 일본군과 같이 철수 하라" 라고 하는 항목을 포함한 명령을 내 보냈다(자료집 4). 오끼나와의 America군 정부보고에 의하면, America군은, 오끼나와 각지에 방치된 위안부들이, " 매사에문제발생원인이 되어 있다고 하면서, 본 섬으로 부터 40명, 기타 섬으로 부터 110명 계 150명을 모집하여, 45년 11월중 조선으로 송환 했다(자료집 106). 그러나, 이러한 송환계획으로 부터 제외된 남은 여성들중, 본국으로 귀향 못한 위안부들도 상당수 있었다. 위안부문제를 파 헤쳤던 尹貞玉(윤정옥)은, 88년, Thailand의 팟쟈이 에 살고 있던 위안부를 방문 했다(윤을 제외한 "조선인어성들은 모두 위안부문제의 여성들). 오끼나와 渡嘉島에 연행 되었던 배본기는, 일본 항복후 石川민간인 수용소에 수용 됬었는데, 고향으로 돌아 갈 기회가 주어 지지 않았다. 그녀가 수용소에서 나왔을 때, "속혀서 일본군에게 연행 되었고, 타국에 버려졌다"고 했다(川田文子 "赤瓦의 家(붉은 기와집)") 한국에 돌아가지 못한 그녀는, 91년10월 사망 했다. 또, 92년에는, 中國 武漢부근에 잔류 했던 원위안부 26명의 명부가. 원위안부대표로 부터 한국대사곤에 제출되어 있었다(중국잔류한국인위안부). 이상은, 한국인의 사례인데, 중국인, 대만인, 동남Asia인, 태평양지역에 잔류하고 있던 사례, Indonethia 인 으로서 본국외에 잔류한 사례 도 앞으로 판명 될 가능성이 많다고 본다.

2). 후위증(Trauma)으로 고통 받다.

  위안부가 되었었다는 이유만으로 여성들은 전후, 그 후위증 Trauma(정신적외상)에 괴로와 하고, 사회적 차별에 고통 당 할수 밖에 없었다. 여성들의 병력에서 눈에 띄게 나타나는 증상으로, 위안부 생활중 감염 되었던 성병, 자궁질환,자궁적출, 불임증 같은 신체질환과, 신경증, 우울증, 언어장애 같은 마음의 병들이 었다. 이하, 전형적인 사례를 열거 한다.

"한국보고서" 증언에 의하면, 19명의 한국 원위안부중, 3명이 장기간 성병으로 고생, 출생한 장남에게서, 매독증상 발현으로 이혼 가정파탄 사례, 자궁병은 흔 했고, 자궁적출, 위안소에서의 구타로 비오는 날에는 온 몸이 아프다는 사례는 많았다. 19명중 6명이 결혼 했지만 (이들중 5명은 후처) 이들 모두는 나중에 모두 이혼 했다. 또 다른 8명은, 정식으로 결혼은 못 했고 동거 또는 첩생활, 남은 5명은 결혼도 동거도 못하고 독신으로 생활,,,,,,,李英淑은, 위안소 생활의 원인으로 생긴 불임으로 이별하는 가슴 아픈 사연, 이러한 가슴 아픈 사연을 거족들의 따뜻한 보살핌으로 행복한 생활을 영위 한 사람들도 있겠으나, 이름을 밝히고 등장 했던 위안부들의 거이 전부의 생활은 불행의 연속이 었다.

"대만보고서" 증언에 의하면, 대만거주 48명의 원위안부의 경우, 전후, 성병에 시달렸던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던 것으로 알려 졌다. 결혼 했던 여성은 31명, 이중 13명은 이혼, 동거자는 10명 이 었다. 위안부였다는 과거를 알았던 남편과 "평화스런생활"을 했던 부부는 4쌍 뿐이 었다. 많은 이들은, 남편에게 과거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안았다고 답 했다. 26명의 여성들이 불임으로(위안부생활로 인한) 양자를 드렸다고 했다.

자궁병 환자는 10명("소장"에 의하면).

"필리핀 보고서" 필리핀의 경우는, 위안부생활을 강제 당한 시일이 적게는 수일에서 수개월, 길어야 2년여 였기 때문에, 폭력에 의한 상처를 적지않게 입었지만, 성적굴종으로 인한 육체적 손상정도는 조선인, 대만인 보다는 적었다. 1950년, 임질진단을 받은 자가 1명, 불임증환자 1명이 었다.이렇다 하여, 피해가 적었다고 말하려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군인의 발길에 차여 좌흉부골절로 몸이 틀어 진 사람, 군도로 어깨를 베어 상처를 입은 사람, 동거했던 상대에게 위안부 생활을 이야기 했더니 가출 했다 라는 증언, 도라마 사피노구 라는 여성은, 남성으로 부터의 성적폭력공포로 인해 평생 독신으로 지났다는 사례도 있었다.

3). PTSD(心的外傷後(심적외상후)Stress 장해,(Phycologic Trauma Stress Disease)

  원위안부들의 정신적외상(Trauma)은 컷다. 일본인 원위안부 匊丸는, 1972년4월26일, 千葉縣 市川市 아파트 에서 Gas자살을 했는데, 때는 49세 였다. 취재하고 있던 廣田和子

는, 일본군은 "가난이라고 하는 약점을 이용하여, 나라를 위한다 는둥, 군속이라는 이름을 내 세워, 그녀들을 위안부로 만들었다" 라고 했다. "어떠한 대의명분을 내 세운다 해도, 신체를 팔았다면, 마음은 상처를 입고 원 상태로 돌아 갈수 없다. 라는것을, 취재하면서, 몇번이나 감지 했다" 라고 말 하고 있다("도락구 섬의 종군위안부 게이샤 匊丸(기꾸마루)"). 한국인 여성의 경우, ( "울화가 치밀어 오르면, 겨울인데도 창문을 열지 않고는 잠을 잘수가 없었다") 고 李相玉은 말 했다. 여하튼, 이러한 고통을 많은 위안부들의 공통적인 겻이 었다. 30세가 지나면서, 노이로제가 발생, 정신착란증이 왔던 崔明順(가명)의 경우는, PTSD의 또 다른 하나의 사례인데, 그녀는, "그때 갑자기 남편이 싫어 지면서 "나가라고" 소리치며 발광 했다" 라고 말 하고 있다(증언). 

대만인의 경우, 자신을 비관 하며, 스스로를 비하하는 의식이 오늘 날 까지도 계속 하고 있다고 했다. "수치 스러움으로 마음이 아팟다" " 사람들로 부터 멀어 지려 했고, 자녀와 가족들 마저에게도 가까이 하려 하지 않았다"" 외출하고 싶지도 않았다" 고 하는 의식이 었다. PTSD때문에 통상적인 생활에 적응이 어려웠고, 때때로 가출 하여 길을 잃어 버린 다 던가, 수시로 자살하고 싶다는 충동에 빠진다"라는 사례도 보고 되었다(대만보고서).

대만에서는, 책임이 일본국가에 있음에도 지금까지 스스로를 책하고 있는 실정 이다. 

필리핀의 경우, 아모니까 바리바데아 는, 일주간의 병영 구금후, 위안소로 부터 도망, 집으로 돌아 왔지만, 그로인한 shock으로 수개월간 공연히 몸이 아프고, 정신적 불안으로, 멍청하게 나날을 보냈다고 했다(필자, Hearing에 의하면). Maria Rosa Luna Benson은, 해방후 약 1년반은, "어린애와 같은 상태" 가 계속 되어 거름마연습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말 하고 있었다(필자의 Hearing에 의함). 동네에서 따돌림을 받아, 집안에서 숨어 살아야 하는 상태여서, 인간불신에 이르랐다 고도 했다. 위안소 생활을 떠 올린다 던가, 꿈을 꾸었을 때는, 지금도 "수일간은, 멍청해 지면서 혼자 말을 하며, 자기 몸을 학대하는" 상태가 된다(소장). 

Holland 인의 경우, 쟌느 오휠루네 가 받은 타격도 대단히 심 했는데, 그 고통의 일단을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 하고 있다. " 어언, 50년이 지난 오늘도 압도적인 공포가 밀려오며 사지 통채를 뿁아내는 듯 몸이 초토화 되는 듯한 감각이 엄습 해 온다. 그것은, 생각 해 보지도 않은 순간에 기묘하게 찾아 온다. 그리고 나면, 끊임 없이 엄습 해오는 고통에 침대에서 끙끙대며 시간을 보낸다. 무었보다도, 괴로운것은, 남편과 잠을 잘 때, 이러한 감각이 돼 살아 난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이 했던 행위 때문에 나는 오늘날 까지 한번도 Sex를 즐겁다고 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前揭, 세계에 물어 보는 일본의 전후처리 제1권).

4). 사회적 차별 속에서,

  사회적 차별도, 그녀들을 밀어 부치면서, 그녀들을 파괴 했다. 黃錦周는, "어덯게하면, 

타인들로 부터 멸시"를 받지 않으며 살아갈수 있고, 죽을 수 있을까 하고 늘 생각 했다"

朴順愛는, " 나 자신 당당하게 살아 갈수가 없었고, 자식들의 일생을 망쳤다고 생각 하며 후회를 해 보지만 아무 소용이 없엇다"라고 회상 했다(이하 증언에 의함). 가정, 주변으로 부터의 차별도 견딜수가 없었다. 金學順은 결혼을 했음에도, 남편으로 부터 "불결한여자 라며, 군인을 상대히고 있었구나" 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文玉珠는, 숙모에게서 "양반의 집안에서, 너 같은 계집이 나왔다는 것은, 수치라며" 비방을 받았다. 대만에서는, 누구도 정정당당하게 사서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하는 상태 였다고 했다. 가족들에게 모할 짓을 했다는 것이 그 이유 였다. 만약,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 가족들로 부터 "죽는 날 까지 괴로움을 당한다 든가" 사실이 알려지면 "그것으로 끝이다" 라고 하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 었다(대만 보고서). 필리핀의, 에누 헤루데루데스 파리사리사 는, 1945년 5월, 에 해방 되어 집으로 돌아 왔는데, 남편은 그녀를 "전염병환자 마냥 취급 했다. 다른 친척들도 "더러운것을 보는 듯 바라 보았다" 라고 했다 (소장). 로시에다  하가르드 나지노 는, 일본병에게 좌협복을 베임 당 했지만, 44년경 일본군 병영으로 부터 해방 된뒤, 가족들과 같이 길을 가고 있을 때, 필리핀 유사르에 게릴라 본부에 연행되어, 강간 당 했다(이하 필자 Hearing에서). 일본군의 관계자라고 해서 범행을 당 했다고 했다. 전후, 그녀는, 마라카느안 궁전 사법성에 가서 게릴라들을 고소 했지만, "정신병자 취급을 하며 상대 해 주지 않았다고 했다.

5). 고통은 끝나지 않고 계속 된다.

  이러한 정신적 억압상태에서, 스스로 과거를 숨기지 않고 당당하게 나서는 자체가, 정신적 억압으로 부터의 일정적인 해방감을 갖일 수가 있었다. 金德鎭은, 정신대협회에 신고하러 가서 "말하고 싶었던 것을 다 말 했기 때문에, 한(恨)을 절반은 풀린 것 같았다" 말 했고, 文必琪도, "오늘까지 혼자서 가슴속에 묻어 두었던 것들을 전부 털어 놓았더니 가슴이 쑥 내려가듯 후련하다고 했다"(증언). 대만에서도, 자신의 과거를 "납득할수 없었다"고  느끼고 있었던 것을, "공정하게 정의를 돌려 놓는다 는 것으로""불만을 깨끗이 털어놓아 좋았다" 고 하는 피해자들도 있었다(대만보고서). 그러나, 永野 일본 전임 법무상의 발언과 같이 일본인들이, 위안부 문제에 관하여, 日本국가 가 국가로서 책임을 부정하고 있는 마당에, 그녀들은, 그들의 존엄이 침해 됨에 따라, 괴로움을 당핳수 밖에 없다. 이점을, 李順玉(가명)은 다음과 같이 말 하고 있다. "아직 이 사회는 우리들을 멸시 하고 있다. 보상을 받는다고 해도, 굴욕적인 것인데, 보상을 받지 못 한다고 하면 이 한(恨)스러운 일들이 갈아 앉을 리가 없다. 옛일을 생각 하면, 심장이 뛰면서 몸 전체가 나른 해 진다 "(증언). 

日本정부가, 책임을 명확히 인정하고, 사죄하고, 배상하여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 시켜 주지 않는 한은, 이 여성들의 고통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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