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위한 교양,

2022.02.27 12:05

김일하 조회 수:14

죽음을 위한 교양, 嵐山光三郞 著,

 

머릿말, 인간은 외"죽기위한 교양"이 필요한가 ?

인간은 죽습니다.

천재적인 양생가(養生家)라 하드라도, 불로장수의 약을 갖인자도, 도(道)를 깨우친 고승(高僧)이라 하드라도, 육체를 달련한 선인(仙人)이라도, 그 누구라도 "죽음"으로 부터 도망 할수는 없습니다. 인류는 이 보편적공포와 싸우기 위하여 여러가지 처방천을 고려 해 왔는데, 그중 최상의 것이 종교 였습니다. 인간은 극락왕생과 사후의평안, 신의나라를 믿는 것으로서, 영혼의영원성을 희구하여 왔던것인데, 그것은 그리스도교,불교, 이스람교, 세상에 있는 모든 종교들이 이세상은 가짜 세상이고, 사후에 오는 영원한 진정한 세계가 있는 것이라고 설교 해 왔습니다. 불교에서는 , 이세상은 무상(無常)이라고 하며, 일체의 것은 생멸(生滅) ,변화 하는 것이지 상주(常住)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라고, 생각 합니다. 무상조속(無常造速)이라 하면서,  인간세(人間世)는, 이동하며 변해 가는 것이 빠르기가 화살 같다고 합니다.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등등,,, 내가 무상이라는 말을 알았던 것은 중학생 때, 兼好(겸호)의 책, "徒然草(도연초)"를 읽고 서 였다. 兼好는 인간세계의 무상을, 인간으로서의 운명이라 하면서 받아 드렸기 때문에 "즐겁기 까지 했다"고 했습니다. 인간이 150세, 200세 까지 산다고 한다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어 버리게 될 것이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기한이 있는 소모품이라는 것이 한편으론 고맙기만 하다고 합니다. 兼好는, 인간세상의 진상을 무상의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 한순간의 태만은 일생의 테만을 불러 온다" "대부분의 말은 쓸대 없는 말"" 볼일이 없다면 남에게 가지 마라" 라고 딱 잘라 말 한 것이, 젊은 시절의 내 마음에 못 같이 새겨졌섰 습니다. 兼好의 무상관(無常觀)은, "사물(事物)에 대한동정심"이라는 미의식(美意識)에 까지 연장 되어 갔습니다. 벗꽃은 만발 했을 때가 좋은 것이 아니고, 태양은 그늘 진 곳이 없이 빛나고 있을 때만이 좋은 것이 아니라는 미의식 입니다. 그것은, "이루지 못한 사랑이 더 아름다울 수 있다"는 생각과 일맥상통 한다는 것 입니다. 兼好의 시대는 蒙古襲來(몽고습래)라는 대사건이 있었던 시기, 겨우겨우 격퇴는 시켰지만, 이로인해 鎌倉(Kamagura)幕府는 그 뒷처리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전전긍긍 했습니다. 이틈을 타서 京都(Kyoto 당시 수도) 거리에는, 악당, 천구(天狗), 요괴(妖怪)들이 난무, 그런 소문이 파다한 시기 였기 때문에, 이러한 세상에 등을 돌리고, 출가하여 산속에서 혼자 살려고 하는 은자들이 많아 졋고, 그들이 쓴 문학을 은자문학(隱者文學)이라고 했는데, 兼好도 그중, 한사람이었습니다.

나는, 대학에서 은자문학을 전공 했기 때문에, 은거생활을 동경하며 마음이 들떠 있었지만, 현실에서는 은거생활이 불가능하여 출판사에 취직했고, 38세가 되는 해에 회사를 사직하기 까지, 허둥지둥 일 하면서 은자와는 전연 다른 생활을 계속 하고 있었습니다. 회사를 그만두고 부터는, "이제부터는 은자가 되야지" 하면서 안심 했지만, 흔히 있는 것과 같이 정신없는 나날에 쫓기다 보니 무엇이 어덯게 되 돌아 가는지 모르는 사이에 환갑이 되면서 되돌아보니 은자적생활에는 도달 할수가 없었 습니다. 兼好는, "사람은 죽으면 내세가 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徒然草 四段)라고 설교하고 있지만, 나는 그 내세라는 것을 실제로 믿으려 하지 않는 인간이었습니다. 兼好가 출가하면서 버렸던 것은 현실세(現實世)가 아니라, 속세간의 복잡하고, 씨그러움이 었던 것 입니다. 거기에 현실주의자로서의 자세가 있었고, 兼好가 지금에 이르기 까지 많은 사람들에게서 읽혀지는 요인이 되었다고 봅니다. 兼好는 "사람이 죽음에 이르게 되면, 임종시의 상태를 알리는 사람이, "평정심을 지니고 돌아 가셨다고, 후회함이 없이 돌아 가셨다고" 라고 말 하기만 하면 되는데, 어리석은자가 있어, 망자를 칭찬하는 말을 꾸며서, 임종시에 이렇게 저렇게 말을 했다고 각색하며, 훌륭했다고 칭찬을 했다면, 이것은 죽은 사람에 대한 모독 내지는 배반이라고 말 한다" "임종이라고 하는 인생일대사(一大事)에 임하여서는, 신이나, 부처님 같은 사람이라 하드라도 얼마나 훌륭한 모습을 보일 것인지는 차치하고 라도,  박학다식한 사람이라 하드라도 죽음에 임 했을 때, 어덯게 되는지는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본인 사자가 조용히 편안하게 임종 하면 되는 것이다."(徒然草 143段) 라고 합니다. 死者(사자)가 조용히 편안하게 임종 하기 위해서는, "일심(一念)으로 부처를 믿어라" 하는 것이, 兼好의 가르침 이지만, 이세상의 앞도 옆도 부처의 얼골을 한 악귀 천지 입니다. 죽어서 묘에 들려 해도 돈이 있어야 하는 세상 입니다. 죽어서도 뼈(송장)가 편히 쉴수가 없읍니다. 그렇다면, 어덯게 하면 되는가 ? 라며 , 고민하게 만드는 것이 이 책을 쓰게 된 동기 입니다. 종교를 믿는 신자가 죽는다는 것은, 그것을 믿는 절대적 힘을 갖인 사람 입니다. 사후세계를 믿는 사람이라면, 정신력이 투철하여 힘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책에서 말하고 있는 "죽음을 위한 교양" 이 필요 치 않습니다. 그런데 無常을 설교한 兼好라 하더라도, 본심으로 내세를 믿었던 것이 아니라 "믿으려고 노력하고 있었을 것 입니다." 그렇다면, 종교에 귀의하지 않은 사람들은, 자기의 죽음을 어덯게 받아 드려야 하는 것일 까 ? 나 자신은, 내세는 없다. 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죽으면 그것은 그것으로 그만 이다, 죽음이란 인간의 끝이기 때문에, 죽는 순간에 모든것은 끝나는 것이고, 완결되는 것이고, 그 뒤는 無다. "생존하고 있다는 사람의 세상" 이란 , 정말 대단한 일이고, 멋진 것이라 말 하므로서, 이 세상은 生者를 위하여 존재 하는 것이라는 것이고 살아 있을 때만이 인간이라는 것 입니다. 생리학적으로 고찰 해 보면, 사람은 죽을 떄,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즈막까지 자신의 죽음을 받아 드리려 하지 않고 저항을 시도 하려 한다고 합니다. 교통사고 같은 경우, 한순간에 숨을 걷운 다면 그런저런

이유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냥 숨을 걷우게 되지만, 즉사를 면하고 수시간 돌봄을 받으며 죽음에 이르게 된다면, "이대로는 죽을 수 없다" "외 내가 이렇게 죽어야 하나" 라는 갈등에 괴로와 할수 밖에 없습니다. 수시간, 수일간이 걸린다고 한다면, 그것은 정말 고통의 연속 일수 밖에 없습니다. 이 고통은 아프다고 하는 것 과는 다른 "죽음을 받아 드려야 하는" 결의의 갈등이라고 하는 것의 고통이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또, 불가항력의 불치의 병을 선고 받고 " 앞으로 2년간의 수명" 이라는 것을 알 때, 이 죽음을 납득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교양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일정한교양(死文化) 이란, "죽음의 의미"를 알아야 하는 작업(교양)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것, 그것은, 인간이 극한에 처 했을 때, 최후의 갈등이라고 말 해도 될 것이다. 얼마만큼의 오성(悟性깨달음)을 갖였다 해도, 자신의 마즈막을 납득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현대와 兼好의 때와는, 여러가지 정보라 던가, 과학적지식의 차가 심 하다 보니, 현대인들은 알게모르게 "지식화 되어 있다" 예를들면, 의학자 이상의 지식을 갖이고 있는 환자도 있다는 것입니다. 의사, 종교가는, 환자들을 연명시키는 기술, 안심하며, 죽음에 이르게 하는(安心入命) 하는 법을 마음으로 받아 드리게 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즉음에 이르럿을 때, 어떤 사람도 자기가 갖이고 있는 교양 보다 못한 사람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나는, "죽고 싶어" "죽을 래" 하는 사람들은 이세상에 많지만, 구체적으로 자살을 시도 했던 사람은 극소수 라는 것이 그것 입니다. " 자살을 하지 않아도 인간은 언젠가는 죽는다" 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 입니다. 이런것을 갖이고 교양이라고 할수 없는 것인 것이, 이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오는 것으로 부터의, 그 이유이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살아오는 동안 죽음 직전까지 가 본적은 몇번인가는 있었습니다. 처음은, 전쟁에서 타서 죽을 뻔 했을 떄, 익사할뻔 했을 때, 8살때, 장페쇄라는 병으로 죽을 뻔 했을 떄, 이러면서도, 사선을 반딧불 마냥 날아서 "아직은 죽고 싶지 안 어 " 하는 의지 만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능이 었다고 생각 합니다. 인도양에서 불에탄 전함으로 부터 탈출 , 어두운 밥 바다 한 복판에 떠 있을 때, 구출되어서는, "죽을 수는 없지" 하며 속으로는 말을 했지만, 이제 정말 "이 모양으로 죽는다면 어쩌지" 하는 불안에 이르기도 했었습니다. 그 떄도, "신의 힘" 같은 것은 믿지 않았고, 오직 자신의 힘만 의지 했었습니다. 종교를 믿지 않는 인간에게는, 그저, "죽기위한 교양" 만이 필요 하게 됩니다. 때가 되었을 때는, 죽음에 임하는 교양 만이, 자신의 죽음을 받아 드리는 처방천이 될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란 생각하고 있지 않을 때 돌연 찾아 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공포를 동반하는 "유쾨함 마저있다" 종교심 없이도, 평온하게 죽음을 맞아 드리기 위해서는 어떠한 지식을 구비 해야 되는가 ? 이 책은 독자를 위한 처방천 임과 동시에 나 자신을 위한 각오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죽음을 받아드리는 힘은 종교가 아니라 교양 입니다" 죽음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 인간은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불치의병을 선고 받은 사람은  죽을 힘을 다하여 "투병기"를 씁니다. Talent, sportman등 유명인의 "투병기"가 사후에 출판이 되면, 사자의 영혼이 독자의 마음에 서식 되어 져서, 죽음의 공포를 망각하게 되는 효력도 있고, "책이 팔리면 유족에게 약간의 금전적인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투병기란, 죽엄을 앞둔 사람의 정상적이 아닌 관점이 표현 된다고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눈물로 호소하는 경우가 된다던가, 여태까지의 생활을 말하는 정도의 것이 된다던가 하면서, 순수한 죽음에 대한 의미와는 약간은 다르게 아니면, 놀라울 정도의 달은 것이 되기도 합니다. 투병기란, 글로 쓰게 되는 것임으로 즉 소설이기 때문에 글 솜씨가 뛰어난 사람이 쓴 투병기는 설득력이 없습니다, 오성(悟性)을 갖인 지식인이 쓰지 않은 모든 것들은 투병기로서의 설득력이 없다는 것 입니다.. 소설가에게는 확신범으로서의 자살자가 있다. 자신의 죽음이라는 것이 최고의 Drama이기 때문에, 표현이라는 기술을 갖이고 있는 직업인에게는 최고의 매력적인 Thema일수 밖에 없는데, 근데 문학자중 三大자살은, 芥川龍之肋, 太宰 治, 三島由紀夫이다. 芥川(Akudagawa)는 문학을 죽음의 동반자로 했고, 三島(Mijima)는 사상으로 무장 했습니다. 이 3인은 다같이 PRO로서, 자살에 이르기 위한 주도(周到)한 알리바이를 준비한 것이지만, 자살하려고 했던 근원적인 이유는 교묘하게 숨겨 져 있었다는 것 입니다. 그럼에도, 자살원망(自殺願望) 소설가가 기도했던 확신적 변명 마저 "死의 의미"를, 사건으로 만 , 열거하고 있다고는 생각하려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이런것으로 보아, "죽음을 위한 교양"이란, 정신의 건강상태가 완전 할 때, 허무에 떨어져 버린 상태가 아닐 떄, 냉정한, 과학적, 실증적으로 쓰여 져야 한다는 것을 필요로 한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직은 죽지 안 어 ! 할때, "죽으을 위한 교양"을 몸에 익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 합니다. 이를 위하여, 이제부터, 나의 죽음에 얽힌 체험으로 부터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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