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위한 교양(문화)

2022.05.23 11:37

김일하 조회 수:7

제3장. 1945년, 3세, 처음으로 죽음과 맞부디쳤다.

  1. 작가가쓴것은 거이가 작품이지만, 소설이라는 모양을 빌린 유서 였다.

    나는 NHK방송"과외수업, 환영합니다, 선배"라고 하는 Program 을 모교인 국립학원 소학교에 가서, 6학년 아이들을 상대로 "사자(死者)에의 추도구(追悼句)를 만드는 수업을 했다. 과이 쉽지 않은 수업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학생들이 놀랄정도로 뛰어난 추도구를 만들어 냈기 때문에 깜짝 놀라 주저 앉을 뻔 했다. 한번더 놀랐던 것은, 아이들에게 "이제까지 죽는다고 하는 것을 생각 해  본적이 있는가 ?" 라는 질문을 했을 때, 였다. 50명학생중, 거이 전부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라고 대답 하고 있다. 아이들이라고 하는 것은, 죽는다고 하는것 같은 생각은, 거이 하지 않으면서 즐겁게 지날 것이다, 라며 멋대로 생각하고 있던 나는, 이 11, 12살 짜리아이들이 언제던지 죽음에 관하여 생각하고 있다는데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이것은 노인들의 생각을 닮았구나, 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었다. 저자는 1942년생 이다. 태평양전쟁으로, 아버지는 전쟁터로 갔고, 소개했던 곳이 어머니의 친정인 靜崗현 中町이라는 촌동네에서 출생 했다. (중약) 전쟁이 끝나고, 아버지는 귀향, 東京으로 이사, 전후식량난과, 유행병등을 겪으면서,죽음이라는 것과 더불어 살아온 우리 세대는, 누군가의 죽엄과 동반 했던 삶이 었다고 생각 한다. 나는 대학에서, 중세의 은자문학을 전공했고, 졸업후 출판사에 취직을 하게 된 인연으로, 내가 좋아 했던 몇사람의 작가들과 맞나게 되는 행운을 가졌었다. 처음으로 내가 맞나면서 감동 했던 것작가는 , 三島由紀夫였다. 당시, 작가를 보좌하는 편집자 였던 나는 檀 一雄씨의 연재담당을 하고 있었는데, 그에 이끌리어 같이 三島 씨 집에 갔었고, 그의 말을 들었으며, 그후, 飯田橋에 있는 Bodybuildind center에서 Traning을 하고 있던 그와 맞낮던 것을 기억 한다. 그 三島由紀夫가 1970년 11월 25일 자살 했다. (중약). 나는 내가 경애하는 작가가 죽었으니까, 꼭 그의 대표작을 읽으려 했다. 작가가 썻던 대부분의 작품은, 소설이라고하는 형식를 빌린 유서였다는 것을 느꼈다. 사실, 서점이라고 하는데는 "유서를 파는 곳" 이 었고, 도서관은 커다란 "유서박물관"이라고 생각 된다. 나는 三島由紀夫의 "풍요(豊饒)(의바다(海)(新潮문고) 전 4권을 읽었다. 이것은 윤회전생(輪廻轉生), 사람이 죽고 나면 누군가로 다시 태어난다는 이야기 였다. 씨는 자신이 죽고나면 재생한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장렬한 자결을 한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 했다. 다음해, 1월, 三島씨의 장례가 築地本願寺에서 영위 되었는데, 나도 참석 했다. 장례위원장은, 川端康成 였다. 그는 식장에서, "三島군의 죽음에는 수상한 점이 없었기 때문에, 三島家 또 平岡家에서는 오늘을 기해, 옛날식으로 말해서 집거페문 하기로 했다. 면서, 장례식도 2개월후로 연기해서 오늘 하게 되었다." 라고 인사 말을 했고, 마즈막에는 "만약 소동이나 난동이 있을 경우, 위원장의 권한으로 언제든지 장례식을 중단 할것을 선언한다" 라고 말 했다. 三島씨의 죽엄은, 자위대의 강요로 자결 했다는 것으로, 바로 말한다면, 범죄적사망이었기 때문에, 장례중에 우익들이 가두 데모로 소동을 이르킨다는둥, 또는, 과격파 좌익이 이틈을 타서 끼어들 가능성이 있다는둥 했기 때문에 소동이 일어 난다면 자기재량으로 장례식을 중단 하겠다는 것이 었다. 

2. 川端康成의 소설에서는, 죽음이란 사람의 등 뒤에 밀착되어, 마치, 찰싹찰삭 물결처럼 다가온다.

  그 川端康成도 2년후인, 1972년4월16일 자살 한다. 逗子라는 곳에 사 놓았던 Mansion

의 한방에서, 평소에 준비 해 두었던 수민약을 마셨고, 마시지도 않았던 Wisky를 목구멍에 쏟아 부으며, 더하여, Gas관을 수반 하며, 죽음을 확실하게 하는 장열한 최후 였다. 나는 씨를 추도하면서 그의 어떤 책을 읽을까 망설이다가 "山音(산음)"(岩破문고)를 읽는 것으로 했다. 씨는, "逗子에서 춤추는여자" "雪國(설국)" 같은 것이 영화화 되었었는데, 일러 말하기를,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작풍의 작품을 쓰는 작가로 알려 져 있지만, 실은, 초기서 부터 항상 죽음을 탐구하려는 작가 였었다. 씨의 소설에는 대체로, 인간의 죽음이란 것은, 마치 사람의 등뒤에 딱 달라 붙어 밀어 부쳐 온다. 라 하고 있었다. "山音"은, 씨가 1949년에서 54년에 걸쳐 쓴 작품으로, 작자의 나이가 드디어 50에서 55세에 이르렀을 때, 쓰여 진 소설 이다. 주인공은 信吾(신오)라고 하는 남자, 川端씨의 집이 있던, 鎌倉의 長谷이 무대로 되어 있다. "신오가 살고 있는집 낭하 저 밑의 밑 나무잎은 가만이 그냥 움직이지 않고 있다. Kamakura의 이른바 세상에서 말 하고 있는 긴계곡 저멀리 깊숙한 곳에서, 들려오는 파도소리같은 소리가 들려오는  밤도 있어서, 신오는 바다에서 나는 소린가 의심 했지만, 역시 생각한대로, 산에서 나는  소리였다. 멀리서부는 바람소리와 비슷 한것이, 땅이 우는 소리와 같은 길고 저력이 있었다. 내 머리속에서 들려 오는 소리 같아서, 신오는 이명인가, 생각 했다. 머리를 흔들어 보기도 했다. 소리가 멈추었다. 소리가 멈추자, 갑자기 신오에게 처음으로 공포가 밀려 왔다. 죽음을 알려주는 것이 아닐까 하며 몸이 오싹 해 왔다. " 이소설은 , 주인공이 산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죽을 때를 알려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신오가 Keisha를 (藝者) 맞낫을 때의 대화가 그뒤를 잇는데, Keisha가 신오의 넥타이를 풀어 주면서 자기 신상의 말을 시작 한다. "2월 조금전에, Keisha는 이 거실을 지었던 목수와 동반자살을 하려 했던것 같았다. 그런데, 청산가리를 마시려고 할 때, 이분량으로 확실히 죽음에 이를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 트림없이 치사량이라고 그 사람은 말 했는데, 그 증거로, 이렇게 한목음씩 따로따로 잘 포장 되어 있지 않은가, 확실히 잘 짜여 졌다." 그러나, 믿을 수 없다. 의심하니까 더욱 의심스러워 질뿐이다. " 누가 이것을 만들었을까, 당신과 여자를 응징하려고 , 고생 좀 해 보라고, 분량을 가감 했을 찌도 모르지 않느냐 말이다. 川端씨가 자살 하면서, 나는, 문득, 이 Keisha의 청산가리 자살 대화장면을 떠 올렸을 것이라 생각 했다.

3. 인간이 생식에의해 "죽음을 극복" 하는 일은 불가능 하다.

  이시기 내가 읽었던 책에, "위구루도르 E. Frankle/ 霜山德爾역의 "死와愛(사랑그리고 죽음)"(Frank저작집 2)가 있다. 그는 처음부터 실존주의 철학자 였는데, 제일 유명한 책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의 사정을 알려준 "夜와霜(밤그리고서리)"이다. "死와愛"의 책머리에 "죽어가는 데이리에게" 라는 헌사가 있다. 데이리는, Frankle부인의 이름인데,그녀는 1940년 초,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죽었다. 그런 그녀에게 바친 책이 "死와愛" 라는 작품이다. 책 제2장에 ""죽음의의미" 라는 Page가 있는데, 그는, 거기서다음과같이 말 한다. "죽음이란 것은 전생애라는 의미를 의문시 한다고, 그리고, 죽음이란 결국전부를 無(무)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에, 결국에는 전부가 의미 없게 된다는 것이라고 흔히들 주장 한다. 그렇다면 죽음은 실제로 생명의 의미성을 파괴 한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고, 그 반대라는 것이다. 외그러냐하면, 만약 우리들의 생명이 유한한것이 아니고, 무한이라고 한다면 도대체 어떤일이 벌어진다는 것일까. 만약 우리들이 죽지 않는다고 할때,우리들은 당연히 여러가지 일어나는 행위들을 무한히 연장할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오늘하던가, 내일 하던가, 아니면 모래로, 1년후, 10년후에 하던가 하는것이, 다 같아 지기 때문이다" 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실존주의적인 죽음의 의미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다소 어렵게 쓰여져는 있지만, 극히 당연한 모양의 현실을 철저히 한실존적 입장에서 말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할때, 예를들어, 유전자론의 입장에서 말 한다면, 유전자가 자손에게 전달 되기 때문에, 죽음이 무서운것이 아니라는 해석을 할수 있겠는데, 이러한 생각을 Frankled은 칼로 베듯 부정 하고 있다. " 인간이 생식에 의해, 그의 "영원화"를 도모하려 한다는 것은, 잘못된 방법이라고, 이것을 갖이고 죽음을  "극복 하겠다" 하는 것은, 전연불가능 하다는 것이다. 외냐하면, 생명의 의미는 자손을 남기려 한다고 하는 주장이 잘못 된 것이기 때문이 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바로 불합리 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판명 되기 때문이다. 첫째, 우리들의 생명은 무한이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는것, 가족도, 자손들도 결국은 죽어서 사라져 가기 때문이고, 전인류도 지구라고 하는 별의 종말에는 전부가 다 같이 죽어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만약 유한한 생명이 무의미 하다고 한 다면, 그때에는 언제 종말이 올 것인가, 그것이 예견될수 있을찌 없을찌 하는 것은 어찌되든 상관이 없게 되고 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생명이 의미를 갖이고 있다고 한다면, 그때 그것은 그 장단이라던가 자손의 유무와는 무관계한 의미를 갖이고 있기 때문 이라는 것이다. 또 생명이 만약 의미를 갖이고 있지 않다고 한다면, 그것이, 언제까지나 계속 된다 하드라도, 또는 무한으로 자손을 남긴다 한들 아무런 의미를 갖이고 있겠느냐는 것이다. 만약 자녀를 남기지 못한 여성의 생애를 이런 눈으로 볼때, 실제로 무의미 라고 한다면,  그것은, 인간은 그들 자손 때문에 만, 살아가고, 그 실존의 의미는, 오로지 다음세대 속에 만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 된다. 그렇게 될 때, 문제는 생명이란 그저 연기되는 것에 불과 하게 되고 만다. 외냐하면, 각세대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서  다음세대에 넘겨주어야 하기 때문 이다. 이때, 한세대의 생명의 의미는 다음세대를 육성하는 의미 이외에 어디에 그 존재 이유가 있는 것인가. 혹여 이러한 자신의 무의미 함이 끊임없이 반복 하게 되는것은, 스스로에게도 무의미 한 것이라는 것이다. 외냐하면, 그 자신에 있어서 무의미 한것은, 그것이 영원화 되는 것으로서 조곰이라도 의미를 만족시켜 주는 것이 못 되기 때문이다. 읽어 가면서,긍정할수도 부정할수도 없는 생각으로 맴 돌았다. 인간의 죽음 이란, 각자 개인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것을 포괄적으로 논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Frankle 에 따르면, 우주론도 유전자론도 인식으로서의 것이지, 구제적이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죽기위한 교양"이라는 것은, 여기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 가서, 사람에게서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피할수 없는 현실이라고 하는 것이라는 것을 다시금 생각 케 g했다.

X
Login

브라우저를 닫더라도 로그인이 계속 유지될 수 있습니다. 로그인 유지 기능을 사용할 경우 다음 접속부터는 로그인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 게임방, 학교 등 공공장소에서 이용 시 개인정보가 유출될 수 있으니 꼭 로그아웃을 해주세요.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