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동남 Asia, 태평양지역으로의 확대( 동남Asia, 태평양 전쟁기);

   1). 남방지역 상황,

       (1), 개전 직전의 상황,

        1941년 12월, 일본은, 미국, 영국, Holland에 대하여 전쟁을 개시 하면서 그들의 지역들을 차례로 점령 했다, 그리하여, 42년 부터, 그들이 점령한 점령지역에 군위안소를 차례차례로 설치 하게 된다. 이것은 전쟁이 개시되기 이전부터 검토 되였던 계획적인 것이 었다. 이것을 증명하는 중요한 기록들이 있다. 그것은, 육군성 의무국 중견간부, 金野節三 의사과장(41년11월 8일까지는 의사과원)이 육군성 내에서 있었던 각종회보(회의)의 모양을 상세하게 필기 했던 "육군성업무일지, 摘錄"(金原摘錄) 이다. 예하면, 개전직전, Holland령, 동 인도네시아를 시찰 했던 군의는,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었다. (金原摘錄, 1941년 7월 26일 부).

"현재 그곳 주민들을 애무하기 위해서는, 성실성을 갖이고, 우리들에게 신뢰감을 갖이게 해야 히며, 이를 위하여 언어행동에 유의를 요 한다고 했다, 많은 회교도들이, 일부다처의 풍속은 있으나, 정조관념이 강하고, 강간등을 범하는 일본군기에 불신을 갖이지 않도록, 엄중한 주의(경계)를 필요 하다. 한편으로는, 원주민들이 생활난으로, 매음을 하는 자들이 많다. 그로인하여, 여러가지 성병을 많이 갖이고 있다. 위안소 설치시, 촌장들과 긴밀하게 협조 하면서, 엄중검사를 실시 할것을 요구 한다. (深田 군의 少佐, 蘭印위생상황시찰보고). 십중팔구, 

深田益男 소좌는 40년9월부터 41년6월에 걸친, '바다비아(현 자가르타)' 에서 있었던, 제2차日蘭會商工會議에 참가 했던 것인데, 이는, 蘭領東印度(난령동인도) 반도를 점령하기 위한 사전, 위생상 필요한 정보 확보를 위한 시찰의 일환이었다고 할수 있겠다. 그 걸론의 하나로서, 일본군에 의한 강간사건 과 성병만연을 방지 하는데 목적이 있었다고 보아야 겠다. 그 방법으로, 지역여성들의 군위안부 모집시, 엄중한 성병검사의 필요성을 제안했고, "촌장들과의 긴밀한 협조"란, 아마도 이것이, 매춘부가 아닌 여성들의 강제징집과 연결된것이  아니었을까 해 본다. 저자는 이것이 여성들의 강제징집의 생생한 증거라고 주장 한다.

2). 개전과 강간사건의 발생,

    실제로, 일본군이 동남아, 태평양지역에 침공 했더니, 점령 각지에서, 강간사건이 발생 했다. 1942년2월12일, 육군성 과장들의 회의(과장회보 라고 하는것) 

와 법무당국은 다음과 같이 보고 하고 있다. " 富집단에서는 적전 도망 112, 강간 3, 약탈 3 의 사례 가 잇었다.,,,,,,,,,,比島(필리핀)방면에서는, 강간 14, 하사관의 부여자 살해사건 마저 있는등,,,,, 여기서 말 하고 있는, 富집단이란, 말레시아침공을 담당 햇던 제 25군을 이르는 것인데, 필리핀을 침공 했던 것은 제14군이 었다. 실제로 이와 같이 육군중앙까지 범죄보고가 올라 간 경우는 극히 일부에 불과 했고, 이 사실은, 침공 초기부터 강간사건이 많았던 것을 의미 하는 것인데, 5월2일, 육군성 국장들의 회의(국장회보)에서, 大山文雄 법무국장과 田中隆吉 병무국장응 다음과 같은 시행 방법을 지시 했다.

"법무국장",  제25군의 독립속사포 제1연대(대대의 오기) 의 현역 대위가, '쿠아라룸프'에서 현지 말레싱인 처녀를 강간, 그때, 시계5~6개를 약탈, 또 '소보르'의 제 3왕녀를 속여, 사진기를 사취 하는등, 강간약탈,사취 범죄를 저질렀다.

"병무국장",  제25군 (이하25A로 약함) 은, '쿠아라룸프'에 오면서, 악평이 있었는데, 그 후 면목을 쇄신 했다.

"법무국장",  比島방면에 있었던 제14군 에서도, 강간사건이 많았는데, 엄중 취체 결과 볌죄가 격감 했다. 

"병무국장", 比島에서는 타 지역에 비해 강간사건이 비교적 많았는디, 중국사변과 비교하면 적은 편이 었다.  

제 25군은, '쿠아라룸프'에 오기전 까지는, 어쨋던 평판이 좋았는데, 말레시아에 상륙 하면서, 상당수의 강간사건을 일으킨 것을 알수 있다. 또, '필리핀'에 상륙 했던 제14군은, "타지역"에 비해, 강간사건이 많았다고 하면서도, 그래도 중국에서 보다 적었다고 하는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중국과 태평양전선에서 일어 났던 많은 성범죄를 륙군 중앙은 얾나 알고 있었던 것일 까 ? 엄중한 취체결과 "면목울 일신 했다" "범죄율이 격감 했다" 고 하는대, 정말 그랬던 것일까 ? 무제가 헤결되었다고 하는 것은, 그 문제들이 한층 심각해 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 한 ㄴ것일 수도 있는게, 이것을 업무 일지는 명시하고 있다. 5월9일, 국장회보에서, 大山 법무국장은, 다음과 같이 보고 했다. "남방군의범죄건수, 237건 대체적으로 중국에 비해 적자. 14A 에서는 강간이 많았기 때문에, 일본인들의 대한 생각이 바뀌여 가교 있다. "여성들이 일본인들을 향한 생각이 바뀐다는 것은 " 도대체, 무슨 말 일까? 大山 법무국장은, 이것을, 27일의 국장회보에서, 남방군의 약탈, 강간은 개전 이래, 76건읋, 많았던 곳은, 14A, 15A(타이,버마방면),

16A (인도네시아 방변), 남방군 직활의 순이 었다고 보고 했다. 또, 6월3일 보고에서는, '말레시아'에 서의 중국계여성 폭행이 5월중에 8건, 그리고, 8월12일에 있었던 국장회보 보고에선 다음과 같이 보고 헀다. 남방범죄 610건, 강간범죄 다수, 중국보다 남방군에서 많았다. 원인은 위안시설 부족,감시감독 불충분에 기인 했다. 구금소에는 약 200여명의 수용인원이 있었는데, 이것을 3~4명의 법무관이 처리하기에는 역부족이 었고 무리다." 강간사건이 변함없이 다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 하는 것에 주목 해야 한다. 그 중에서, 중국으로 부터의 전용된 부대에서 사건이 많았다는 지적은, 중국에서의 강간사건의 다반사를 증명 한다는 것으로 중요한 보고 였다

(3). 남방군에 의한 위안소 설치,

     동남 Asia각지에, 전개되여 있는 육군부대를 지휘하고 있는 것은, 남방군총사령관 寺內壽一 대장 이다. 남부군각예하부대에 위안소를 설치를 위한 위안부배치, 게획을 실시 했다. 이러한 사실을 확인 하기 위해서는, 먼저, 1942년 3월 2일부, 의. 대만군(사령관 安藤利吉 중장, 참모장 桶口敬七郞 소장)에게 전보를 보내야 했다.

台電 제 602號.

陸密電 제 602호에 관하여, "보르네오"行, 위안부원주민 50명, 모집하는 대로 파견 함. 남방총군에 의한요구이며, 陸電623에 기초하여, 헌병조사로, 선정된 아래 영업자 3명의 도항을 허가 할 것을 신청 함.(자료집 19)

남방군으로부터, 대만인 위안부 50명을 "보르네오" 가리만단 島에 파견 해 주었으면 하는 요청, 헌병이 선정한 사업자 3명의 도항을 허가 해 주었으면 하는 내용 이다. 요청처는 육군대신 이 었고,  이 신청서는 16일부 인데, 육군성 부관으로 부터 허가를 전달 받아 실행 했다. 업자는 50명의 위안부를 대동, 도항 했다. 대만군은, 6월 13일 현지도착후의 상황에 따라, 인원부족시에 생기는 경우를 고려, 영업에 지장이 없도록, 다시, "위안부 20명의 증파"허가를 요청하는 전보를 발송 하고 있다.(자료집 20). 이것들은 "秘"라는 도장이 찍혀 있는 암호전보 였다. 다음은, "버마(현 미안마)에 보호되여 있던 조선인 20명의 위안부와, 2명의업자 부처로 부터의 심문기록을 통합했던, 연합군 동남Asia 번역심문 Center", "심리전심문보고" 제2호(1944년11월) 에 따르면, 42년 7월10일, 703명의 조선인 위안부와, 90명의 엽자, 가족들을 태운 선단이 조선에서 싱가포르를 향해 출항 했다.(자료집 100) 이들 위안부는, 조선군 사령부의 지시로 업자들이 모집 했던 것으로, 그 배후에는, 남방군으로 부터의 조선에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 라고 생각 된다. 이 선단은 대만에 도착하여, 대만인 여성 22명을 승선 시켰다고 했다. 또, 같은 해 7월, 중국 南京에서 위안소를 경영하고 있던, 의부로부터 부탁을 받은, 香月久治, 上海에서 군위안소 경영자모집에 응모 했던 井上菊夫등은, 그들 나름대로 위안부들을 모집해서, 상해에서 "아도라즈 丸" 라는 배에 태워 "싱가포르"로 출항, 도착하자 그들은, 군의 명령으로 각지를 돌아 다니게 된다.중국에서 12명의 조선인 여성을 모집 했던, 井上은 상해에 집합한 업자들에게, 자기는, "남방파견군총사령부"의 요청으로, "安國(베트남)파견군총사령부가 이것을 주선 했다" 운운 한것을 기억 하고 있다고 했다.(熊本방송보도특집, "漂泊의結果" 1992년3월16일 방송, 西部留美子"종군위안부와15년전쟁"

이것은, 남방군에 의해 위안부들이 모집 되었다는 명백한 사실 입증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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