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군위안부(동남Asia의경우):

2021.05.25 12:11

김일하 조회 수:32

5. 동남Asia의 경우;

  1). 군에의한 징집,

    동남Asia에서의 위안부모집은, 중국에서와 같이 군이 전면에 나서고 있던것이 특징이다. 동남Asia침공 초기에는, 군의 병참부대가 위안부 모집을 담당 했다. 제25군(말레시아 작전을 담당)병참부에 소속 되어 있던 병사의 증언에 의하면, 1942년1월2일, 말레반도 상육지점이었던 싱고라에 있던 병참장교 3명이 타이랜드 방코크 출장을 명 받고, 거기서, 그들은, 일본주재기업 주재원에게 부탁하여 23명의 창부를 모집 받아, 성병검사를 통과한 3명을 데리고 돌아 오는등, 각지에서 군위안소 개설을 담당 했다고 했다. (林 博史 "말레반도에 있었던 일본군 위안소에 관하여") 해군도 스스로 징집에 들어 갔는데, 인도네시아, 스라웨이島(섬) 남부, 겐다리,아모이도, 바우바우에 있는, 해군직영위안소에는, 담당장교가 있었고 그가 직접 징집 하고 있었다. 또, 민정부가 감독했던 제23위안소에서는, 모집과 고용계약을 군속과 실업단원들이 실시 했고, 모집된 여성들을 각군위안소에 배분 하고 있었다(자료집83)

 

2). 싱가폴 에서의 모집,

  싱가폴의 중국계신문 "昭南日報(소남일보)"1942년3월5~8일 付에, "征求接待婦"(접대부모집) 이라는 광고를 내고 있었다. 그내용은, 각민족의 접대부 수백명을 모집한다는 내용과, 년령은 17세로부터 28세, 보수는, $150이상, "暗業(매춘을 의미)도 可(가), 응모할곳은 랏 부르즈 호텔. (林 博史"싱가폴의 일본군위안소") 이 람 부르즈 호텔은, 병참부에서 경영하는 장교용 호텔이 었다. 근위산포 부대의 통신부 장교 總山孝雄(전후 일본학사원회원)의 회상에 의하면, 2월27일에 이미 군위안소가 개설 되어 있었다고 했다. 昭南日報에 실렸던 광고는 혹시 이것과 관련이 있었던 것일까,,,, 어쨌던, 제25군사령부의 후방담당이 위안부를 모집 한다고 하니까, 이제까지 영국군을 상대하던 여성들이 속속응모 했다고 했다. (總山, "남해의여명") 싱가폴에서는, 점령직후 공공연이 위안부가 모집 되었는데, 처음에는 매춘부, 나중에는 생활고로 고생하는 여성들이 응모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여성들은 하루에 한명정도를 상대 하는줄 알았는데, 병사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며 밀려들어 오는 모습을 보며 비명을 올렸다고 했다. 4,5명을 상대하고 다음 병사가 들어 왔을때, 거부하는 소동이 일어났기 때문에, "여성들의 수족을 침대에 묶어놓고" 계속하게 했다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병사는 말 했다.(동상, 자료에서) 어처구니 없는 강제성 이었다.

 

3). 지역 유력자들을 밀어 부쳐서,

   2장에서 본것과 같이, 동남Asia에 침공하기전, 육군중앙에서는, 강간방지와 성병예방을 위하여, 군위안소 설치계획을 수립했는데, 위안부를 촌장들에게 활당하여 모집하는 것으로 했다. 지역유력자들에게, 명하여 모집했던 이러한 사례는 동남아 각지에서 발견 되는데, 1942년5월, 필리핀 루손島 스에파피스가야 州 아리다오에 주둔하고 있던 어떤중대에서는, 병사가 강간미수사건을 이르켰던 관계로, 파욘본의 대대부관의 명령으로 각부대에 위안소를 설치 하게 했다. 대대본부 付(부)의 下津 勇중위는, 통역관을 대동 뛰여 다니며 각부대가 주둔 해 있는 지역 촌장들에게 부탁 여성들을 모집했다. 모집된 여성들을 면접, 신원조사후 그중, 50여명을 채용 했다고 했다.(下津 "泥濘과黃塵(니녕과황진") 또 민다나오島 라산지구 코로니 에서비행장건설을 시작한, 제126야전비행장건설대의 경리소위는 상육직후, (44년6월) 완피스용 천을 갖이고, 다바오의 유력자를 방문 위안부의 주선을 의뢰, 일주일후에 6명의여성을 인수 받아 군위안소를 설치 했다고 했다.(高野부대 민다나오섬 전진기) 아레---의 쿠와라비아에서는 보병제11연대의 어떤 중대장은, 치안유지회의 회장대리(華人)를 불러 내어, 여성들을 모집 해 달라고 명 했다. 이즈음, 각지역에서 일본군에의한, 중국계주민의 학살이 있었음으로 만약 거부하면, 살해당할찌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겁에 질려 미망인등 18명을 모집 해서 보냈다. 모집된 여성들은 울면서 귀가를 호소 했지만 무시 당했다고 했다.(林 "말레반도 일본군위안소")

또 하나의 분명한 강제모집 사례 였다.

 

4). 사기로 인한 연행의 예,

  사기에 의한 연행이 횡행 했다. 필리핀, 루손島 라구나 州 태생, 후란시스카, 나베사, 아우스타리카 는, 이 사레에 해당 된다. 그녀는 1942년12월경, 냇가에서 세탁을 하고 있었는데, 마가피리(일본군협조자들을 일컷는말) 가 와서, "세탁부 일을 하면 받는 급료를 집으로 보내준다" 고 말 했다고 했다. 그걸 믿고 그녀는 4명의 다른 여성들과같이, 일본군주둔지에 갔다고 했다. 그중 2명은 12세였기 때문에 무거운 세탁같은 일을 할수 없다고 돌려 보내 졌고 나머지 3명은 위안소에 보내 져 위안부가 되었다고 했다. 그때, 그들의 나이는 18세 였다. (고소장에서) 인도네시아, 보르네오(가리만단) 島, 다시간에 주둔 했던 경중포병제32연대제1중대의 한 병사는, 44년 그곳 위안소에 있었던 리나-라는 위안부로 부터 자신들은 수산회사의 사무원으로 간다는 말에 속아서 스라웨지島에서 가레라에 끌려 왔고 거기서 위안부가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동중대 전우회 八木會編 "우리들의 군생활")

 

5). 필리핀에서 폭력에 의해 연행,

  필리핀에서 잇었던 흔한 사레로서, 많은 필리핀 위안부들로 부터 들을수 있는 말이다. 이런 증언에서 상기되는 것은, 군에의한 폭력적연행이 아주 많았다는 것을 의미 하는데, 고소장에 의하면, 46명의 피해자 거이 전부가 군에의한 폭력적연행이었다는 것인데, 이중 최저연령은 10세, 최고30세, 미성년자는 33명(10대)이었다. 필자가 행했던 Hearing중 전형적인 사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고소장과 나의Hearing에서). 마리아,루나,엔손 은, 루손島, 아버지가 베레스의 대지주, 어머니가 그의 하녀 사이에서 태어 났다. 일본군 침공후인 1942년 소개해 있던 마을에서 나무를 하고 있을 때, 일본군병사에게 강간을 당 했다. 당시 14세. 다음해, 안베레스市에서 항일 게릴라들과 같이 물소가 끄는 짐차에 타고일본군검문소를 통과 하려고 할때, 불러 세워졌고 그녀만이 연행 되었다고 했다. 그후, 일본군이 쓰고 있던 병원에 감금되여 있다가 정미소였던 건물로 이송되여 일본병의 조수로 일 했다고 한다. 주 1회 성병검사를 받았다고 하는것을 보면, 이곳은 군위안소가 아니었을까 해 본다.  또, 로시타,파가루트,나지노 라는 여성은, 바나이島 이로이로州 태생으로, 일본군점령인 42년에 어머니 가 사망, 아버지는 아사 했다. 그녀는 이로이로州 사탕공장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44년 공원 일을 그만두고 할머니가 살고있는 에스탄지아로 돌아 가던중, 할머니집 근처에서 일본군에게 납치되었다. (할머니의집에서 20Km떨어진곳에 일본군부대가 있었다). 그녀는, 에스탄시아의 제빙공장에 끌려 갔고, 거기서, 장교와 하사관 병에게 차례차례로 강간을 당 했다고 했다. 그녀는 이공장에 약 1개월간 강금되어 있었는데 거기에는 약15명의 여성들이 있었다고 했다. 필리핀에서는 일본군에 대한 게릴라 활동이 많았기 때문에, 일본군은 주민들을 적대시 하게되었고 따라서 필리핀에서는 군에의한 폭력적 여성 연행사건이 특히 많았던 것이다.

 

6). 인도네시아에서의 폭력적 연행,

  인도네시아에서도 폭력적 여성연행 사건이 적지 않게 있었다. Holland軍의 자료를 이용 했던 大村哲夫의 연구에 의하면, 가리만단島 폰데이아고市 에서는, 1943년 전반에 해군 파견부대의 대장이 재류일본인의 "축첩금지령"을 발표함과 동시에, 일본인과 성적관계에 있는 주민들을 강제적으로수용(收容)하는 명령을 내려, 해군특별경찰대가 모집했던 3개소의 해군용 위안소와 5,6개소의 민간용 위안소에 입소시켰다고 했다(大村 "현지조달"되었던여성들). 44년 전국이 악화되면서, 안본島에 있었던 일본인위안부들을 후방으로 후송 했고, 8월에는 지방여성들이 있는 위안소를 페쇄 시켰다. 그런데, 해군경비대 장교의 회상에 의하면, 이렇게 모든 조치를 취하고 나니, 얼마 안 있다가 군인들의 비행이 시작, 드디어 통제불능이 되자, 제4 남 파견함대 사령부(정확하게는, 해군제25특별근거대 사령부)의 선임참모 지휘하에 군위안소를 재차 설치하게 된다. 위안부체험자, 매춘부, 매춘의 소문이 있는자 내지 지원자를 대상으로 명단을 작성 교섭을 했는데  여의치 않아 "어느정도는 강제성이 잇었다고" 말 했다. 치안유지임무를 맡았던 특별경찰대가 전면에 나선다는 것이 보기에 좋치 않아, 협력이라는 전제하에 부관이 중심이 되여, 정무대(민정경찰)을 모집 하는 것으로 했는데, 그들을 지휘했던 사정관으로부터 이장교가 들은바로는, 사바로島 에서 명단에 있는 여성들을 강제로 배에 태웠더니 주민들이, 항구에 몰려와서 여자들을 돌려 달라 구호를 웨치며 시위를 했다고 했다.(晴道 "해군특별경찰대")이때 모집되었던 여성들은 유라시안(백인과인도네시아혼혈)과 인도네시안 인들이 었다. 또 위의 사례와 일부중복되는데,, 해군제25특별근거지대사령부付 경리장교였던 坂部康正의 회상에 의하면, 안본島 에서는, 일본인위안부를 귀향시킨뒤 사령부 참모가  4개소의 위안소를 개설 하려고, 약 100명의 위안부를 현지 조달한다는 안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내용을 보면, "일본군장병과 간통 했을시 엄벌에 처한다" 라는 포고를 낸다음, 밀고를 하면 포상한다는 말을 퍼트려 "밀고를 장려 했고" 현지주민과 경찰관을 이용하여, 일본군에 우호적인 자들을 수용, 용모가 좋고 성병이 없는자들을 선정 위안부로 한다는 안(案)이었다.(해군경리학교보수학생제10기문집간행위원회 편 "滄溟(창명)") 그는 Club에서 울어대는 젊은 여성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마음이 까맣게 타는것 같았다 고 회상 했다. 이렇게 동남Asia, 태평양지역에 걸쳐서 여성들과 위안부들이 강제연행 되었다. 인도네시아의 경우, 外海諸島(외해제도)라든가, 버마, 필리핀 등에서 일어 났던 사례들과 같은 사례들이 있었다고 했다. 전장에서 명시한대로, 인도네시아는 조선과대만, 중국등으로 부터의 위안부 공급원이 되었던 지역이 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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