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위안소의 日常은 어떤 모양 이었을까 ?

  1). 강요된 성교,

     지금까지, 日本에서는 여성들을 연행시 강제 라는 문제가 문제시 되었었는데, 어쩌면 그것 이상으로 중요 했던것은 위안소내 생활속에서 강제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하 이점에 관하여 검토 해 보려 한다. 제3장에서본것과같이 여러형태로 연행되어 온 여성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말할필요도 없이 성교의 강요 였다. 물론 이 전에 치러야 하는 행사로서는 군의관에 의한 성병검사였다. 기생양성학교를 마치고 양부의손에 끌려 北京에 갔고, 거기서 군트럭을 타고 군위안소에 연행되었던 金學順(김학순)은 위안소의 첫날밤을 다음과 같이 말 했다. "장교가 방으로 들어 왔다. 나를 모포로 씨우고 나를 옆방으로 데려가려 했다. 도중 친구가 도우려 왔었지만, 힘에 밀려 옆방으로 끌려 갔는데, 그 장교는 나의 옷을 벗기려 했습니다. 와중에 나의 옷은 찢어졌고 결국 그는 나의 처녀성을 뺐어 갔습니다. 그날밤 그는 나를 두번에 걸쳐 겁탈 했습니다" 고 말 했다. 1941년의 일이 었고 당시 그녀는 만 17세였다. 그날이후, 그녀는 매일오후부터 군인들을 상대 했다고 했다. 토벌작전이 끝난 날이면, 특히 사람들이 많이 몰려 왔기 때문에 하루 평균 7~8명을 상대 했다고 했다. 장교용 위안소는 분비지 않았지만, 하사관, 병용 위안소는, 아주 많을경우, 20~30명이 될때도 드믈게 있었다. 버마에서 위안소를 경영하고 있었던 업자 香月久治는, 어떤날은 위안부 한사람이 60 명을 상대 한적도 있었다고 했다. 이런 여성들은 3일은 휴식을 취해야 했었다고 했다. (필자와의 Interview에서). 이런경우를 

예외로 하더라도, 대부분의 여성들에게는 대단한 고통이 었을 것이다. "몇번이고 성기에 종기가 생겼다"(李英淑,이영숙) 그럼에도 우리들은 거부 할수 없었다고 했다. 성에 굶주린 병사들은 살기 들린듯, 그들의 요구를 거부하면 폭력을 휘둘렀다. 이러한 군위안소의 분위기는 군인편에서 보더라도 이상하다는 것을 넘에 괴상 했다. 한 장교는, 베트남, 나트랑에 있던 위안소의 모양을 다음과 같이 기록 하고 있었다. "떠도는 소문으로만 듣고 있던 ' 몸을 파는 집 위안소' 라고는 하지만, 그것이 이토록 막되어먹은 것 이라는 현실에 자극을 받았다기 보다, 이상한 세계를 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낮에 당당하게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자들의 코앞 문 저편에서, 바지를 반쯤내린 상태로 문을 나서는 자의 뒤를 이어 들락날락하고 있는 생생한 자태, 이런류의 긴장속에서, 마치 공장의 콘베어 System 같이 돌아가고 있는 이 모양은 금단의 과일을 알지못하는 나를 비틀거리게 했다(南原幸夫" 흔들리고 있는 佛印"). 군인 이면서 군위안소를 보며 기절초풍 했다. 행열을 지어서 밀려드는 군인에게서 위안부들이 겁을 먹었을 것은 당연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거부 할수 없는 상태, 李容洙(이용수)는 "오히려 경영자들에게 혼나지 않을까 하면서 마음 조렸다"고 했다. 文必璂(문필기)는 "시키는대로 하지 않으면, 군인들은 단도를 다다미에 꽂아놓고 성행위를 했다.(증언). 그들이 원하는 대로 따라하지 않으면 장병들이나, 고수입을 바라는 업자들이 폭력을 휘주르며 위협 했기 때문이다.

2). 술을 마시고 하는 폭행,

  술을 마시고 군위안소에서 난폭한 행동을 하는 군인들은 많았다. 이같은 몇가지의 사례를 보자. 1941년11월, 어떤 軍曹(군조"특무상사',역자주) 는, 입장권 없이 위안소에 들어와서, 상대를 거부하는 위안부를 구타폭행 했다. 또 武昌에서 위안소를 방문했던 한 병사는, 휴업중이라며 상대를 거부했다고 위안부를 대로복판으로 끌고 나가 폭행구타 했다. 42년2월, 한 伍長(분대장급,역자주)이, 중국인 위안소에 들어가 검을 빼어들고 난동을 부린 사건. 또다른 軍曹는 검을 빼어들고 판벽을 부수며 업자와 위안부를 인질로 했던 인질극, 어떤 예비역 少尉는 한밤중 군위안소에 가서 입실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난동을 이르킨 사건(이상, 중부 중국파견헌병대사령부 "육군군인,군속비행표",41년11월~42년2월) 어쨋던, 술을 마시고 저질렀던 사건사례 였다. 이것들은 고발 되었던 사건으로서, 드믄드믄 보고 되었던 것이지만, 각자의 방속에서 일어났던 사건은 수없이 많았을 것이다. 고발된사건의 처벌은,,, 고작 초범임으로 엄중훈계, 고작해야 중근신정도의 형이 주어졌었다.

3). 휴일은 있었던가 ?

  전장에서 보았던것 처럼, 위안소규정에는, 위안부들이, 병사, 하사관, 장교의 순으로, 아침부터 밤중까지 군인들을 상대 했다. 장교들이 숙박을 하는 날이면, 24시간 구속될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위안부들에게는 휴일이 없었던 것일까 ? 있었다. 월1~2일 정도. 

독립공성중포병 제2대대 "常州주둔군내무규정" (1938년3월 자료집 41). 또, 오끼나와, 山3475부대 "내무규정"(44년12월, 高崎隆治 편"군의관의 전장보고의견집")에서, 휴업일은 매월 1회 였다. 필리핀의 마스바데島 경비대의 규정에선, 일요일에서 금요일까지의 부대별사용일과 일정이 활당 되어 있었는데, 오직 토요일 낮동안 만이 휴일 이었다. 그 마저 오전은 성병검사, 오후 5~7시까지는 하사관 그 이후시간은 장교들의 시간(자료집 69).

4). 보수(報酬)에 관하여,

  군위안소에서 장교들은 통상 요금을 지불 했다. 그러나, 병사들은 본토,식민지의 공창을 연상하며 그 기분으로 위안소에 갔다. 그런데 위안소 실태는 열악한 상황에 있는

본토와 식민지의 창기들 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 있는 군위안소에 가서 돈을 지불할 기분이 나지 않는다며, 돈 지불하기를 꺼려 했다. 그러나 군당국은, 그들 위안부들과 배분활당규정을 갖이고 있었기 때문에 돈을 받을수 밖에 없었다. 馬來(말레반도) 군정감이 결정했던, "위안시설 또는 여관영업 준수규칙" (1943년)에 따르면, 위안부들의 取金分(받는 몫)은, 前借金(미리빌려받아슨 돈) 이 2,500엔 이상자는 번돈의40%이상, 1,500원미만의 경우는 번돈의 50%이상, 無借金(빚이 없느자)는 번돈의 60%이상 으로 하고 있다. 이규정은 위안부보호를 목적으로 제정된 것이기 때문에 좋은 것이 었다. 또, 이규정 부칙에는 , 배당금의 100분의 3을 강제저축 하게 했고, 이중 3분의 2이상을 前借金 반환을 위한 것으로 했다. 그리고, 위안부들의 업무상에서 생기는, 임신 ,질병등에는, 본인이 보험에 가입했을 경우, 절반부담, 그렇지 않을 경우, 본인전액부담으로 하고 있었다. 이규정은 위안부들에게는 최량의 조건이 었다. 그러나, 많은경우, 의상대, 화장품대, 일용품대 같은 법외로 사용하는 금액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 배당금 대부분을 소비 할수 밖에 없었다. 빚이 없어지면, 또, 별도로 강제저금,국방헌금 같은 명목으로 돈을 받아 냈기 때문에 실제로 이들의 주머니에는 쓸 현금이 없었다. "증언에 의하면, 19명의 朝鮮人 위안부중 배당금을 업주에게 맡겼는데, 다 청산하니까 돌려 받을 돈이 없어서 돌려

받지 못 한 자가 7명, 배당금이 어덯게 되었는지 모르겠다는 자가 5명, 배당금을 업주가 관리하고 있었다는자가 4명, 배당금을 받았다고 하는 자는 단 3명뿌이 었다. 이로미루어 볼때, 대다수는 배당금을 받지 못 했던 것으로 된다. 

필리핀 의 경우, " one Peso를 받았다는 자가 한명 있었다. 정식위안소가 아닌 강금윤간같은 사례가 많았던 관계로 장병들은, 요금지불 개념이 없었기 때문 이라고 한다. 

台灣위안부의 경우, 48명중 44명이 배당금을 받았다고 했고, 나머지 4명만이 배당금을 받지 못 했다고 했다. (台灣보고서). 이 조사에 의하면, 48명중 가족들에게 송금 했던자는 8명, 우편국이나 은행에 저금 했던 자가 9명 있었다. 

朝鮮人위안부의 한 사람인 文玉珠(문옥주)(일본명 文原玉珠 또는 吉子)의 군사우편저금원부가 구마모도 저금사무Center에 남아 있는 것이 발견 되었다. 그녀는 1941년에 계약기간 만료로 위안소를 나왔었는데, 42년 다시 어머니 빚을 갚기 위하여  응모 해서 위안부가 되었다(증언). 그녀의 예금액은, 43년3월부터45년9월까지, 26,145엔이 었다. 이때 이자는 195엔이 었다. (廣崎類 , 종군위안부에게는 지불이 안되는 군사우편저금) 그녀의 예금액은 월 평균 843엔이 된다. 그녀는 이것말고 고향의 부모에게 5,000엔을 송금 했다고 했다. 처음부터 그녀에게는 빚이 없었고, 공식요금 이외에 병사들에게서 받았던 웃돈 때문에 이 정도의 돈을 뫃을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文玉珠는 아직까지 이 저금액을 돌려받지 못 하고 있다.

버마에 있던 한 병사는, 증언에서, 군표를 갖이고 일본군의 뒤를 쫓아서 산과들을 헤메던 위안부들의 모습이 가끔씩 떠 올라 온다고 했다. 이것에 관하여 한 경리장교는 다음과 같이 기록 하고 있다. " 집을 떠나서, 길고긴 산길을 오르 내리며, 우리들 부대뒤를 따라 걸어오고 있는 4~5명의 여인들이 잠시 떨어지녔다가는 다시 나타나곤 한다. 그녀들은 일본군을 상대로 육신을 파는 여성들이라는 것을 담박에 알수 있다. 조선인 여성도 있고, 일본인 여성도 있다,,,,,,,, 그녀들은, 커다란 등짐을 지고 있었다. 그들의 무거워 보이는 등짐속에는 버마군표 다발이 들어 있다. 그녀들은 그것을 누구에게도 맡기려 하지 않고 자기만의 짐속에 간직하고,  어깨를 파고드는 무거운 짐에 짖눌리면서 땅으로 기어들듯 걷고 있었다. (하마다芳久"버마패전기"). 그런데 이렇게 저금을 하고 있던 자들은 전후의 Inflation과 화페개혁으로 커다란 손실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전후, 文玉珠와 같이 식민지출신자들은 이것을 인출할수 없게 되었다. 또 군표를 소유하고 있던 자들도 패전과 더불어 무가치 해진 군표 때문에 대부분 큰 손해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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