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Holland인 위안부 문제(스마란 위안소사건의 전말),

  (1). 사건의경과,

     위안부징집이, 전후, 전쟁범죄문제가 되여, 관계자들이 전범으로서 재판을 받게 된 사건이 쟈바島, 스마란위안소사건이 었다. 이사건은 아래와 같다. 

이사건은, Holland령 동(東)인도(현인도네시아)에서, 많은 젊은 Holland여성들이 위안부가 되였던 사실을, 전후, Holland에 의해 B, C 급 전범으로서 재판했던 사건을 말 한다. 이 사건의 자세한 내용은 현재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인데, 1992년8월30일, 재판자료를 입수한 "朝日신문"이 상세하게 보도 함으로 세상에 알려 졌전 것이다(제 1 보는 동년7월21일). Holland정부는, 자료를 공개하지 않는 대신에 94년1월24일 자료조사에 기초하여, "일본점령하 란령(蘭領)東인도네시아에서 있었던 Holland인 여성에 대한 강제매춘에 관한 "Holland 정부소장 문서조사 보고서" 라고 제(題)한 보고서를 발표 했다. (이하, Holland정부 보고서라고 약칭한다) 또, "스마란 위안소 사건관계 재판자료"(朝日신문사자료) 를 , (이하"재판자료로 약칭"한다)

이상 2 개의 보고서를 보면서, 이사건의 경과를 돌아보고 사건의 의미를 검토해보겠다. 

1944년 1월, 쟈바島 중부州 스마란郡에서, 일본군은, 새로운 군위안소 설치를 계획 했다. 위안부모집을 담당했던 장교는 재판에서 한 공술에 의하면, 스마란에는, 원래 군위안소가 있었는데, "주둔군에 성병이 만연" 했기 때문에, "주둔군의 주민에 대한 행위가 대체로 주민들의 반감을 사고 있었음으로" (재판자료), 위안소 설치를 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여기서도, 성병의 만연과, 군인들에의한 불법행위가 새로운 군위안소 설치의 동기가 되었던 것으로 된다. 문제를 이르켰던 모체는, 남방군 간부후보생대 였다. 이 간부후보생대는 남방군 직속이 었는데, 당시 이 부대장은 스마란주둔군사령관을 겸임 하고 있었고, 주둔지사령관은, 바다비아에 있는 제 16군 사령부의 지휘하에 있었다. 그런데, 유럽계민간인을 수용하고 있는 억류소의 관활권은, 쟈바 군정감이 갖이고 있었는데, 이것을 또, 제 16군참모장(國分新七郞 少將)이 겸임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43년 11월에 새로운 "군억류자취급규정"이 제정 되었는데, 그것에 의하여, 군억류소를 설치 했고, 그 관리를 군정감으로 부터 군사령관에게 이양 되게 되었다. (쟈바 군억류소의 정식 발족은 44년3월) 이런관게로, 군억류소의 여성들을 위안부로 하기 위해서는, 제 16군사령부의 허가를 받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던 것이다. 스마란州 장관으로 부터 위안소 설치를 요청 받은 간부후보생 대장은, 제 16군사령부(사령관原田능吉 中將)에게 억류소의 여성을 위안부로 하는 허가를 요청 했다. ( 당시, 아직 억류소를 관리하고 있었던 군정감, 주정부측의 책임이 해명되어 있지 않았다). 간부후보생 대장의 공술에 의하면, 당시, 쟈바 군억류소 소장에 취임예정자 였던 장교는, " 이후, 생기게 되는 문제를 예방하기 위하여서는, 위안부에 지원하는 여성들에게 확인자필서를 받아야 하는 것이 좋다" 라고 했다(재판자료, 朝日신문). 또, 군위안소 설치계획서를 제출하여 정식으로 허가를 받았던, 병참담당 少佐는 공술에서, "군사령부는 " 위안소에서는 자유의사자만을 고용하도록 엄중하게 주의 했다고" 라고 했다.(동상)

(2). 사건의 경과,

  그런데, 남방군간부후보생대는 위에서 말 했던 지시를 무시 했다. 2월후반, 상담장교, 경찰, 위안소경영자들이 억류소로 부터 젊은 여성들을 강제적으로 징집 했기 때문이다. 이때, 스모와오노, 파레곤, 판베르싸리의 3개소 억류소 에서는, "징집목적을 알게된" 유럽인 리타 등이 맹렬하게 저항 했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체념하고 돌아 갔다(Holland정부보고서). 젊은여성들이 연행되었던 다음의 4개 억류소의 경우를  알아보자.

a. 하루마에라 억류소,

  11명이 연행되었는데, 병으로 3명이 귀소, 수일후 16세의 소녀가 어리다는 이유로귀소, 되었다고 했다. (판결문에서는, 연행된자는 8명)

b. 안 바라 와 제6억류소, 제9억류소, (판결문에서는, 제4, 6억류소)

  여성들이 강력히 항의 했지만, 강제적으로 18명의 여성들이 연행(판결문에는 17명)

c. 가디간 억류소,

  맹렬한반대가 있었기 때문에, 강제징집을 포기하고, 매춘부였었다고 하는 소문의 여성 십수명의 "지원자"를 연행 했는데, 수명은, 바로 귀소 되었다. 징집 되었던 여성은 약 35명이 었다 (전후, 바로 있었던, 파다비아 군사법정에서의 판결은 적게는 하루마에라, 안 파라와, 제4, 6 억류소로 부터 연행 되었던25명에 대한, 강제연행과 매춘을 강제 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3월 1일 부터 스마란구락부, 장교구락부, 청운장구락부(雙葉莊), 히노마루구락부 라고 하는 4개 구락부에 입소 했다. 그중 장교구락부는 남방군간부후보생대의 장교전용이 었다고 했다.

 

3). 쟌누, 오휘에르네의 체험,

  위안소에 연행되었던 그녀들은 어떠한 체험을 했엇던 것인가를,  쟌누 오휘에르네 와 에리 코라~ 환 데루 푸로그 의 경우를 갖이고 알아 보자.

a. 쟌누, 오휘에르네~ 라는 여성은, 스마란 근처의 사탕농장을 하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여 났다. 아버지는 Holland 인, 그녀는 5남매중 3녀였고, 수녀가 되기위하여, St, Francisco 회 교육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일본군이 침입, 강제로 안비라와 억류소로 연행 되었다. 당시21세. 억류소는 악취, 오물, 쥐, 하수 등으로 뒤범벅이 되여 있었다고 했다. 중노동, 기아, 폭력, 질병이 횡행 했던 무시무시한 곳이 었다고 했다 (오휘에르네 "강간당하는 여성의 부르짖음" 이하 이것에준 하다). 1944년 2월 어떤날, 일본군 장교가 나타나서, "17세이상의 독신여성은 정열 하라" 라는 명령을 했다. 불길한 예감이 든 그녀는 될수 있는 한 눈에 뜨우지 않게평범한 모양을 하고 나갓다. 장교들은 정렬 해 있는 소녀들을 위아래로 흘터 보았다. 우리들은 그 모습이 하도 우수워 웃었다. 그녀의 기억으로는, 16명의 소녀들이 선발 되었고, 소지품을 갖이게 하여 군 트럭에 타라고 했다. 소녀들의 모친을 선두로 억류소의 여성들이 항의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스마란에 도착한 이들 중 7명이 트럭에서 내려 졌고, 각자에게 방이 배당되었다. "재판자료"에 의하면, 약35명의여성은, 시내 호텔로 갔는데, 먼저 장교용구락부에서 일 할 7명이 선별 되었고, 계속해서 다른 3개 위안소로 분산 수용 되었다고 했다. 개관 첫날 밤에는, 많은 장교들이 몰려 왔고 식당에 뫃여 있던 소녀들은 공포에 휩싸여 울음을 터트렸고, 저항하는 중에 한사람씩 장교들에 의하여 뽑혀 나가면서, "발버둥 치고 소리치며 저항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했다 ."외냐하면, 격노한 군인들이 군도를 뽑아 신체부위에 갖다 대면서, 그녀들을

위압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체가 되었고 궁지에 몰린 고양이 앞에 쥐새끼가 된 우리들을 마음껏 갖이고 놀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 나체가 되었고 나는 남자들의 무거운 몸뚱아리에 눌려 버리고 말았습니다. 필사적으로 발로차며 저항 했지만 상대는 너무도 강 했습니다. 강간당하는 나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 나왔고 전신은 사시나무 떨듯 떨려 왔습니다. 근처에 흩어져 있는 옷을 줏어 들고, 더러워진 취욕의 상처인 몸둥아리를 씻어 버리려고 나는 욕실로 뛰어 갔습니다. 다른 소녀들도 와 있었습니다. 모두들 쇽크로 인하여 울고 있었지만, 어덯게 해야 할지 모르는채, 서로가 서로를 위로 하는 일 이외는 할수있는 일이 따로 없었습니다. 방금 일어났던 모든것들을 씻어 버릴양으로 우리들은 몸을 씻고 또 씻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들은 뒷방에 숨었는데, 바로 발견 되었고 , 그날밤, 다른 수명의 군인들에게 똑 같이 강간 당했습니다. 다음날에도, 해질무렵이 되면서 어제와 같은 일이 반복 되었다고 했다. 오휘에르네의 회상에 의하면, 7인의 여성들은, Christ의 신앙으로 서로를 의지하며 지나고 있었다고 했다. 언제나 십자가상을 옆구리에 차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인들은, 우리를 "십자가소녀들" 이라고 불렀다. 매회 그녀들은 발로 차며 저항 을 계속 했는데, 성병진단검사를 받으러 갔을 때는, 진료소에서 군의들에게도 강간을 당하게 되는데 이러한 절망속에서도 그들을 뒷바침 해 주고 있었던 것은, 신에 대한 그들의 신앙 이 었다. 고 했다.

4). 에리~ 프로그의 체험,

 에리,코리,환,데루, 프로고 는, 1923년 1월, Holland에서 출생, 일본군이 침입했던 42년에는, 양친 제매(弟妹)와 더불어, 동 쨔바, 에지엔바 에 살고 있었다. 당시 19세. 부친은

Holland인, 모친은 인도네시아 인이 었다. 이들은 잡화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하는 필자 청문에 의함) 42년 5월, 일본군에 의해, 외국인 억류자로 등록 되어 쟈바 에서 집단거주지에 들어 갔다. 본장 벽두에 "외국인거주등록증명서발급" 시기는 이때 였다. 그후, 그들은, 하루마에라 억류소에 이송입소 되었다. 44년 2월, 여러사람이 억류소에 와서, 25세로 부터 35세까지의 여성들을 집합시켜, 그들 앞을 걷게 했다고 했다. 이틀후에도 같은 짖을 하게 하면서, 그 때는, 15세, 16세는 제외 한 나머지를 집합 했고, 3일 후에도 같은 짖을 반복 하며 여성들을 지명 했다. 지명된자들은 개인소지품을 갖이고 자기들이갖이고 온  뻐스에 타라고 했다. 그들의 기억으로는, 약15명이 었다고 했다. 거역할수 없었고, 억류소의 지도자 마저 항의 할수 없을 정도 였다. 그녀들에게는, 담배공장에서 일을 하게 된다든가, 비서, 사무원, 간호부, 보모 등이 된다고 했다.  이것은 다 거짖말이 었고, 우리들은 수십명이 뫃여 있는 4개의 가옥에 분산 배치 되었고, 거기가 바로 군 위안소 였다. 그녀가 배치 받았던 집은, 한 Holland 인의 집이 었섰는데 크고 넓었다. 가옥은

개조 되어 있었고, 母屋(모옥)에는, PaPa라고 불리우는 업주가 Ticket을 파는 곳이 었고, 응접실, 식당, 욕실과 몇개의 침실이 있었고, 뒤켠에는 심부름꾼들이 사용하는 방6개와 욕실 하나가 있었다. 그녀는 뒷방쪽에 들여 보내 졌는 데, 그곳에 있던 일본인 여성으로 부터 일본군에게 쾌락을 제공 하여야 한다고 말 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 하는 지를  잘알지 못했다 . 그녀의 기억으로는, 이곳이 개업 된지는, 2월26일 이 었다고 했다. 첫날밤에 그녀는 맹렬하게 저항 했던 관계로, 그후 말을 듣지 않으면 식사제공이 안 된다는 규칙 까지 만들어 졌다 했다. 달려드는 일본인들은, 수부에서 Ticket을 구매 했고, 걸려있는 여성들의 사진을 보고 선택, 방으로 들어 와서는 표를 보여 주는데, 거기에는, 1시간권, 2시간권, 종야권 등이 었다. 그런데 우리는 업주에게서 현금을 받은 적은 한번도 없었다. 위안소는 대체로 밤부터 시작 하는데, 매일 3명을 상대 했다고 했다. 욕실에는 빨간 물(과망간산가리)를 넣은 비데가 놓여 있었다. 군인 , 군속을 상대 한 뒤에는 반드시 세척을 했다. 그녀는 가능한 한 욕실에 오래 머므르려 했다고 했다. 그래야 그만큼 자유시간을 갖일수 있었기 때문이다. 성병검진은 주 1회였는데, 그녀는 항상 성병인 임질에 노출 되었다고 했다. 휴일은 일주 일회, 요일은 결정되여 있지 않고, 군인, 군속,

PaPa상 이라고 하는 업자의 기분에 따라 결정 된다. 평일에 오는 군인들은 군도를 차던가, 장식이 달린 군복을 착용했는데, 계급이 높은 사람들이 었고 , 일요일에는 "병사의 날' 이라고 하며, 별개의 건물에 끌려가서 병사들을 상대 하는데, 평일보다 상대히는 인원이 많아서, 정말 공포 스러웠다. 그녀들은 기회가 주어지면 도망 가려 했지만, 불가능 했다. 밖에는 두명의 보초가 착검을 하고 지키고 있었고 "도망가면 헌병에게 붓잡힌다" 고 협박 당 했다. 실제로 도망갔던 사람들이 헌병에게 잡혀 오기도 했다. 유럽계통의 여성들은 외모가 현지인 들과는 판이하여 바로 식별 되여 바로 발견되게 된다. 이들을 숨겨주었던 인도네시아 인들은 일본군으로 부터 벌을 받기 때문에 그녀들을 숨겨줄 엄두를 못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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