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군위안부, 패전후의상황,

2021.10.19 11:20

김일하 조회 수:25

제4장 패전후의 상황,

 1. 패전직후 연합군용 위안소.

    1). 연합군을 대하는 공포감,

       1945년8월15일. 일본은 Postum 선언을 수용 항복 했다. 항복후, 일본인들의 큰 걱정중 하나가, 일본에 상륙 해 오는 연합군병사들의 대규모 강간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 었다. 이러한 공포감과 혼란이 확대 되여 가는 배후에는, 일본병사들이 Asia, 태평양 각지에서 많은 강간사건을 일으켰다고 하는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전시중 일본정부가 했던 선전의 영향도 컷다. 예를들면, 日本橋區에 있는 한 공장의 공장장은, "정부가" 미영인들은 야수와 같다. 만약 패전하고 나면, 국민 특히, 부녀자들은 대부분 욕을 볼 것이다. 라고 선전 해 왔기 때문에 일억 국민들은 이것을 믿고 있다 " 라고 지적 하고 있었다(8월20일부, 경시청내정보고, 栗屋憲大郞編, 자료 일본현대사 제1권). 이런것들이, 국민들의 불안을 부추겼던 것이다. 에를든다면, 神奈川縣에서는, 빠르게는 8월15일, 현청 여직원들에게, 3개월분 급료를 주어 해고 하면서, 소개를 권고 했다. 이러한 조치로 縣內 회람판에서 부녀자들의 강제소개를 명 하는 등,,비상혼란을 갖여 왔다고 했다(細川護貞, 細川일기). 동경에서도 젊은 여성들을 소개 하려고 하는 가정들이 많았었다. 앞에서 말 했던 8월20일자 의 경시청 내정보고서 에서는, 도민의 최대의 걱정은 "부녀자들에 대한 폭행, 능욕 운운 하는 공포감" 이라고 기록 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 보다 더 문제였던 것은, 이러한 보고가 계속 됨에 따라 이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대규모의 위안오락시설(특히 접대부)의 설립이 필요하다고 요망하는 자들이 많았다고 하는 것이 었다. 얼마 안 있다가 있었던 일이 지만, 三重縣 지사의 보고(10월2일)에서도 같은 지적이 나타 난다. 미병폭행에 대비 하는 억측,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진주군을 위한 시설의 완전준비를 당국에서 적극적으로 확충 할 것에 관한, 이라는 요망을 강력하게출원 했고, 특히, 부녀자들이 이를 요망 했다" 라고 보고 하고 있었다(栗屋, 川島高峰編 '패전시전국치안정보' 제5권). 결국, 일부여성들을 "인신어공(人身御共)"하는 것으로서 여타의 부녀자들의 안전을 도모 하려는 발상 이라 하겠다. 

2). 연합군 위안소 설치를 지시,

   주민중에서, 특히 여성들이 자신들을 위한 희생자를 연합군병사들에게 제공 하려고 하는 목소리가 나왔다고 하는 것은 비극적인 광경이 었다. 그러나, 이러한 동기를 부여 했던 것은 일본정부의 대  연합국 군 정책이 었던 것이다. 연합군이 일본에 진주한 것은 8월28일 이었는데, 그전, 8월18일 , 일본정부는 스스로 자청하여 연합국 군용위안소의 설치를 지시 하고 있었다. 국미들의 공포감이 커지면서 소요사태가 일어나면 즉시 행동으로 옮길수 있도록하기 위함이 었다. 일본은, 군위안소 제도를 갖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움직임은 빨랐다. 8월18일 지시는, 橋本政實 내무성경보국장으로 부터 각 부,현,지사 등에게 전달 되었다."외국 군주둔지에서의 위안소설치에 관하여" 라고 하는 통첩이 그 것이다. 이 통첩에는, "외국주둔군위안소시설" 등에 있어서는, 경찰서장이 특정지역을 설정 할것, 일본인은 이 시설의 이용 금지, 경찰서장은, 성적위안시설, 음식시설, 오락장(Dance Hall)등에 적극적인 지도를 하며 설비의 충실을 기도 할것, 영업에 필요한 부녀자는 예기, 공창창기, 여급, 작부, 상습 밀매음범 자들을 우선적으로, 할 것을 지시 하고 있다 (노동성 부인 소년국편"매춘에 관한 자료' 개정판). 결국, 여기서 말 하고 있는 위안시설은 연합국군용의 성적위안소시설이 중심이 었고, 이를 위하여 정부의 취체 대상이 었던 밀매음자들 까지동원 하려고했다는 것이다.이것을 수용하면서 전국에 연합군전용위안소가 설치 되었다. 동경(Tokyo)에서는, 동경 음식요리업 조합, 동경 대합업 조합회, 동경도 대좌업(貸坐業)조합 등 8개업계단체가"당국의내명을수락""국체 호지의 대정신에" 부응하여 특수 위안시설협회(Recreation and AmusementAssociation 약칭RAA)를 결성(취의서) 8월18일, 황거전(皇居前) 광장에서 설립선언식을 했고, 9월3일에는, "매일신보"에 광고를 내어, "특별여자종업원"을 모집 했다(小林大治郞, 무라세 아끼라"아무도모르는 국가매춘명령" 이하 이것에의함). 최초의 위안소는, 교하마地區에 설치 되었던, 小町園인데, 8월27일에 개점 했다. 그후, 쇄도 해 오는 American병사들에게 겁을 먹고 "여성들은 울면서 기둥을 붓 잡고 움직이러 하지 않았다". RAA는, 위안부 5,000명을 모집 할 계획이 었는데, 발족 당시 모집된 인원은 1,360명 이 었다. 또, 고급장교를 위한 전용 접대소가 설치 되기도 했다. 愛知縣지사의 내부정보보고서에 의하면(9월20일), 名古屋(나고야)에서는, 시내 유력자 5명이 연합국전용위안시설 "국제고급향락 나고야 Club"의 설립을 위하여, 9월14일로 부터 Dancer 211명, 여급 219명, 안내인 250명의 지원자를 모집 했다(전揭, 패전시 전국치안정보 제5권). 北海島에서는, 10월4일 이후, 미군이 상륙 해 있었다. 도청은 즉시, 위안소설치를 진행 시켰다. 도경찰국보안과의 동월 30일에 완결된 문서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9월18일 신설된 보안과에 따르면, 10월5일, 도내 札幌(삿뽀로) 외, 4개 市에 진주한 연합군에 대한 특수위안시설에 중점을 두고 개설한 기생집(貸坐屋), 소요리집을 이용할때, 성적위안부에 충실을 기하기 위해, 기생집, 소요리집을 페 하여, 이를 개조하여 위안부시설에 노력 한 결과 당시 450여명의 지나지 안 았던 것을 770명여로 증가 시켰기 때문에 위안부 상향 응급 조치에 기했다고 했다. 이로인해, 현재 부녀관계 사고등이 전무하며 원활히 운영되고 있다(北海島청"昭和20년장관사무인계서).미군의 진주 기미에 접하여, 도청지도에 따라서"특수위안시설"을 서둘러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매춘업을 운영 하려고, 기생집, 소요리야를 개조 하는 형식으로 위안부 770명을 모집 증원 했기 때문 이라는 것이다.

3). 우익(右翼)의 적극적인 개입,

  정부, 경찰의 지도, 원조를 받아서, 위안소 설치에 돌입한 예를 본다면, 매춘업자 관계자 외에 우익들이 자본원이 되어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었던것에 주목 할 필요가 있다.

大阪府(오사까)특고 1 과의 내부정보보고"구 국수동맹의동정"(9월19일)은 다음과 같이 설명 하고 있다. 구 국수동맹(舊國粹同盟)에서는, 젼총재 笹川良一의 실제 笹川良三을 사장으로 한, 구 간사 岡田多三郞,松岡三次를 총무로 해서 연합군위안소American Club을 大阪市南區九郞右門町앞, 구 미가사야 음식점 자리에 개설 개업(8월18일) 했다. (전게, 패전시전국치안정보 제6권)전후, 선박진흥회에서 이름을 보게되는 笹川 Groupe은, 패전직후, 大阪에서 재빠르게 연합군용위안소를 개설 했던 것으로 알려 져 있다. 또한

岩手縣 지사의 내정보고(9월26일)에 의하면, 전 대일본적성회(赤誠會)岩手지부장은 오는 총선에 입후보할 예정으로 "현재 진주군 수입에 관한 위안시설관계자중에 들어가서, 열씸히 진두에 서서 유곽지대 上田 이전문제, 설치, 계획 등으로 분주 했던 상태" 였다(동상, 제2권). 연합군상대의위안소설치에 관해서는, 경찰은 물론, 우익, 매춘업자들이 연대 해 있었다고 보아야 하겟다.

4). 연합국 군병에 의한 강간사건'

   연합국 군병에 의한 강간사건은, 일본군과 같이 심하지는 않았지만, 간간히 일어 나고 있었기 때문에, 결코 그냥 지나쳐 버릴수는 없었다. 神奈川縣에서의 최초 강간사건은, 8월30일 인데, 3건 있었다. 神奈川, 千葉 두현에서 일어 난 강간사건에는, 내무성 보안과장(미병 불법행위대책자료에 관한 건, 9월4일)은, 말이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대략 이렇다, 정식으로 성교를 요구 했는데 거절 당하자 권총을 드리 대고 감행 했다" 라는 것이다(전게, 자료, 일본현대사 제2권).

종전중앙연락사무국 자료에 의하면, 강간사건은 9월말에 이르기 까지 44건(미수30건)에 이르고 있다(荒敬編"일본점령외교관계자료집 제3권). 강간사건은 피해자들이 신고 하지 않았 던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실제 피해는 훨씬 많았을 것으로 본다. 그럼에도, 강간을 방지 한다는 명목으로 일부 여성들을 희생양으로 하는 위안소제도를 바로 시행에 옮겼다는 데에는 문제점이 있다고 할수 있다. 앞에서 말했던, 北海島도경찰국보안과의 문서에서 보듯, 위안소 설치와 위안부 모집이 순조롭게 진행 되었다고 말 하면서, 우리에게는 부녀관게 사고가 없었다며 자화자찬을 해도 되는 것일까 ? 생각 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일본군이 스스로 강간사건을 방지하려 했던 발상을 전후가 되어서도 확실히 반성하고 변화 해 있지 않았다는 것에 문제가 있었다 고 본다.

5). 위안소의 페쇄,

   이러한 상황하에서, 연합군 간부가 스스로 여성을 요구했던 예가 있었다. 1945년9월, 총사령부에 불려 갔던 與謝野光 東京都 방역과장은, 군의총감으로 부터"여자문제" 를 갖이고 Smith공중위생복지국장 과, 연합국 군용의 위안시설에 관한 문제를 주고 받았다고 했다(往本利男 점령비록 상권). 또, 해군의門司武官府경리부장(主計長)이었던 小松康宏의 회상에 의하면, 45년경, 관문지구의 미군 사령관으로 부터"미군용위안소를 만들지 않겠느냐는 상담을 받았다. 위안부중 "싫다고하는자들에게는 퇴직금을 주고해산"했고, 희망자로서 미군을 상대하도록 해서 미군을 위한 위안소를 개설 했다고 했다(해군 주계9기회"5분전의 청춘"). 그러나, 46년3월25일 미제8군사령부는, 미군장병의 공창,사창,밀매음 등, 이와 유사 매창행위를 하고 있는 업소에 출입을 금지하는 포고를 냈다(市川房枝 編"일본부인문제자료집성" 제1권).그 원인은 먼저, 연합군병사들의 성병만연과 관계가 있다고 하지만, 이 보다 먼저, 1월2일에, 연합국 군총사령관이 "공창페지에 관한 각서"를 제출하고 있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이것을 3월에 포고를 받은 경찰처보안부장은 3월26일, 미군에 협력 할 것을 전경찰서장에게 통첩 했다. 그리하여, 연합국군용의위안소는 없어 졌던 것이다. 일본정부에의해 추진 되었고 업자에의해 개설 되었던 연합군용위안소는 이렇게 소멸 했다. 그럼에도, 연합국군이 진주 해 있었던 지역의 많은 주민들이 시설을 요망 했기 때문에, 단기간 까지는 전국 주요도시에 설치 되었던 것들은 그대로 방치 되여 있었다는 사실은 중요 하다고 하겠다. 한편 연합군으로서도, 단기간이라고는 하지만 이것을 수용 할수 밖에 없었다. (그후에도, 미군기지주변의 매춘시설이 없어 지지 않고 상존해 있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 이다.)결국, 일본인들도, 연합국 군인도 전쟁중의 종군위안부제도를 인권침해문제로서 촉구해 간다고 하는 의식이 희박한 상태로 추이(推移) 해 나갈 수 밖에 없었다 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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