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군 위안부, (각국 군대의 경우 )

2021.11.10 12:34

김일하 조회 수:1517

2. 군대에는 외, 위안부가 따라 다니는 것인가 ?

  1). 英,美軍의 경우,

    이제, 제2차세계대전중, 종군 위안부와 유사한 재도를 만들었던 것은 일본군 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검토 해 보려 한다. 점령지에서 미군병사들의 강간사건을 이르켰던 것은 사실이 었고, 또, 미국군 스스로가 전용군위안소 설치를 했던 경우도 있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여러번, 연합국 군에서도 있었다. 전쟁중이 었기 때문에 있을 수 있는 일이 었다고 하겠다. 이렇게 볼때, 일본군 만이 나쁘다고 할수는 없겠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이 나쁜 짖을 했다고, 내가 한 행동이 면죄의 대상이 된다는 논법이 정당화 되어서도 안된다. 이런것을 확실히 하고, 각국 군의 실태를 알아 보기로 하자. 사실, 각국 군대의 주변에도 유사한 군위안 시설이 만들어 졌던 사실은 명백하다. 田中利行은, 구미(歐美)의 문헌들을 조사, 그 실태를 마무리했는데(알려진 전쟁범죄), 이 연구를 참조하면서, 영국군, 미군의 개요를 알아 보려고 한다. 

(1). 北 Africa 도리폴리,

  영국의 육군지휘관들이, 현지에 있는, 민간인 매춘옥의 존재를 인정, 허가하면서, 매춘부들에게 군의 위생검사를 받도록 강제 했다. 현지에 있는 몇개의 매춘옥을 병참부대 하사관에 의해 직접 감독하도록 하면서, 매춘옥을, 백인장교용, 백인준위및 하사관용, 백인사병용, 비백인사병용 으로 나누어 놓았다. 병사용 이던 매춘옥에는 Italian 여인이 4명 만 있었기 때문에, 노상에는 차례를 기다리는 병서들의 행렬이  만들어 졌다고 했다.

(Cynthia Enloe, Dose Khaki become you?)

(2). India, Deli,

  대전이 시작 하자마자, 영국군 지휘관의 승인하에, 군전용매춘옥이 설립 되었다.

Thomsos Rd,에 있었던 장교용매춘옥의 여성들은 거이가 백인여성들 로서, 그중에는 남편이 출장중, 돈이 필요 했던 장교부인도 있었다고 했다. 이 군용 매춘옥은, London으로 부터의 명령으로 페쇄 된다. 이곳에 있던 매춘부들은 다른 장소로 이동 했다. 페쇄의 원인은, 성병의 만연방지 때문 이라 했다.(同上)

(3). 北 Africa,

  미군의 George Pattan 장군은, 군용매춘옥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고 알려 져 있었는데, 이것을 실현 할 경우, 병사들의 처라 든가, 어머니들이 반대하면서, 본국에서 대논쟁이 일어 날 것이고, 연방정부 의회에서문제가 되어 전쟁수행에 지장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단념 했다고 했다(Bernard R. Fall, Street without Jay).

(4). 중국 곤밍(昆明),

  42년, 중국군을 위한 미중공군특별편대(Flying Tiger)라고 하는 의용군을 편성 했다. 

Jhon Node 의 지휘하에, 90기의 탑승원과, 지상원의 절반이 성병에 감염 되었기 때문에, India로 부터 12명의 매음부를 비행기로 수송하여 고용 했다고 했다. 그런데, 이것을 인지한 India Burma 중국 육전 영국군의 Josept 스티이루웨르 사령관은 격노, 즉시, 이것을 페쇄 했다. (The ordora white의 "역사탐구" 상권)

이상의 예로 볼때, 미군에도, 영국군에도 다 같이 전용위안소가 설치, 또는 그것에 준 하는 것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수가 있었다. 물론 대개는 페쇄 되었는데, 이것은 본국으로 부터의 반발이 두려웠기 때문 이었다. 사회운동가, 여론, 의회등의 여성인권옹호의 소리가 없었다면, 군대 그 자체는, 위안소 유사시설을 갖이고 간다는 경향을 배제 할 수가 없었겠다. 이런점에서, 일본만이 특별 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겠다. 다만, 중요한 것은, 여성들의 강제연행, 강제사역, 미성년자의 사역등이 있었다 든가 , 아닌가 라는 문제 이다. 또, 이런 문제가 발생, 명백 해 졌을 때, 페쇄명령 따위의 조치를 취 했는가 하는 것 같은 점이다. 이런것들은 금후의 연구로 밝혀 질 것이 지만, 그럼에도, 군 중앙이 계획하고, 추진 했다고 하는 점에서는 다른 연합군과, 일본군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또, 연합군측의 군기가 일본군에 비해 지극히 엄했다고 하는 면에도 차이가 있었다는 증언도 있었다. 패전직후, Manila에 파견 되었던 河邊虎四郞참모차장을 동행 했던 통역은, " 그들 미군의 군기는 극히 엄정 했고,,,,,,,,,,오락시설에 있어서, 우리 당국과 미국의 것을 비교 할때, 확실히 다른 면이 있었다. 우리는 이것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고 말 했다(前揭, 細川일기). 확실한 것은, 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승리가 눈 앞에 보이면서 점령지에 있는 연합군의 금욕적이었던 자세가 붕괴되여 갔던 것은 사실이 었다. Normandai상륙 직후, 불란서측은, 미군의 전용매춘옥을 몇칸 제공 했다는 사실이 있었다 (미군 사령부는 이것을 3일후 페쇄 했다) . 종래에 있었던 매춘시설의 이용을 금지 하지는 않았다(도우스昌代, McArther 의 두개의 모자").또, 일본점령후, 일본정부가 제공했던 RAA를 미군이 수용했고, 성병의 만연으로 페쇄 할때 까지, 이것을 이용 했던 것은 앞장에서 말 했던 대로다. 연합군의, 군기엄격 이라는 배경에는, 연합군의 휴가제도를 빼 녾을 수가 없다. 미군의 경우, 큰작전을 앞두고, 휴가를 주어, Australia, Hawai, 미서해안지역등에 갈수 있게 했고, 거기서, 가족,친구, 연인과 맞날수 있는 기회가 주어 졌고, 적당히 놀수있는 기회도 주어 졌다는 것에도 있었겠다.

 

2). 소련군의 경우,

  소련군이 군전용의 매춘옥을 갖이고 있었던가 아닌가는 알수가 없다. 확실한 것은 소련군이 많은 강간사건을 이르켰던 것은 사실이 었다. 대일전 참전후, 소련병사들이 중국동북지방에 있던 일본인 여성들을 강간 했던 사실에 관해서는 많은 증언들이 있다. 이때, 일본측은 강간을 방지 하기 위하여 위안소 설치를 제안 했던것이 전해 지기도 했다. 소련국경 근처 개척단촌에 살던 여성들로 부터 들은 이야기를 쓴 大原眞子에 의하면, 이 여성이 어떤피난소에 있을 때, 소련병사가 들어와서, 여자들을 물색하며, 14~5세의 소녀들과, 젊은 여성들을 연행 해 가는 것을 목격 했다고 했으며, 이여성들은 강간을 당 하고 난 뒤 돌아 왔다고 했다(大原眞子"슬픔이랑 송화강에 띄워 보내고"). 봉천(奉天)의 거류민단 회장(滿州봉천차량 사장)의 회상을 보면, 일본인 양조장집에 백주에 3인의 소련군병사가 침입, 21세의 젊은 처를 윤간한뒤, 국부를 술병으로 쳐서 죽였다고 했다.(宇 佐美喬爾 "아~滿鐵(만철)"). 이런 상황이 계속 되는 가운데 일본측은 소련병사 위안소를 설치 했다. 남만주철도撫順(무순)탄광직원의 회상에 의하면, 침입 해 온 소련군병사는 손목시계, 만년필과 금품을 약탈 했고, 밤이 되면 사택의 문을 두드리며 술과 먹을 것을 요구하며 "여자를 내 녾으라"며 협박했다. 탄광당국은, 8월중에 Dance Hall 과 다른 시설을 정비 함과 동시에 "시내의 예창기(藝唱技)와 각지에서 피난 해 온 부녀들을 모집,,,,,,소련군 병의 위안시설을 설치 했다" 라고 했다(久保田勳"망향남만철도"). 이것은, 후에 국민정부군용 위안시설이 됬다고 했다. 林郁이 들었던이야기로는, 9월하순, 어떤 개척단에서는, 부단장의 지시로 15세로부터 21세의여성 15명을 병대의 "위안"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소련군에 보냈다고 했다(新編大河는 흘러 간다). 일본인들은, 소련군을 위하여 자국의 젊은 여성들을 희생하여 제공 하고 있었다가 된다.

 

3). 독일군의 경우.

  독일에서도 국방군,  친위대 등 각군에 위안소가 있었다고 했다. 독일 국방군의 위생관리를 과장 된 형태로, 해당 문제를 취급 했다는 입장에서 연구검토한 것을 인용 한다면, 국방군은 군 중앙의 명령으로 , 점령지에 대량의 군전용매춘옥(위안소)를 설치하고 있었다. 1942년 단계에서, 그 수는 500개소에 달 했다고 했다. 그 시설의 설비,감독,물자공급은 현지사령관이 담당 했으며, 점령지의 대부분의 병참기지를 군의 부속으로 했었다.

설치, 제일 동기로는, 성병이 만연 했기 때문이 었다. 독일은 세계제1차 대전시, 많은 성병환자를 내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위생관리를 철저히 하려 했던 것이다. 검진은, 주 2회였고, 불란서, Holland에서는, 기존의 매춘옥을 이용 했다. 동부점령지에서 모집된 여성들중에서는, 강제노동에 처할 것인가, 군전용매춘옥에서 일 할 것인가 라는 문제에 내 몰린 여성들이 많았다고 했다( Franz Seidler Prosttution, Home sexuality. Selb stiverstummmerlung). 독일 국방군으로서는, 성병 만연방지는 특별히 중요한 관심사 였기 때문이 었다. 

 

4). 일본군의 체질적이 었던 문제,

  위안소 위안부에 관한 위와 같은 각국 군부대의 공통성의 차이는, 그들 나름 대로의 군대구조, 성격에 깊은 관계가 있다고 본다. 다시한번, 일본군의 경우를 보자. 어찌하여 대규모의 위안소제도가 필요불가결이 라고 했던 것일까 ? 이것은 일본군 군기 유지문제와 (南京사건). 大正 민주화운동 이후, 일본의 병사도, 권리의식에 눈을 떳었고, 지적, 문화적으로 성장 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와중, 병사들에게 종래와 같은 군기의 절대적복종을 요구 한다는 것은 불가능 했다고 했다. 육군중앙은, 1921년(大正10년)에 군대내무규정 개정에 서명 했고, 실시 했다. 병사들의 "자각(自覺)에 기반을 둔, 복종을 실현 시키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大正 말에서 昭和 초에 걸쳐, 국내에서 노동농민운동의 기세가 높아 지면서, 더불어 일본공산당 운동이 표면화 되었고, 중국에서도 시민민족해방운동이 활발 해 지는 가운데, 병사들의 감시체제를 강화 하려고 황군위식을 주입 하려고 하는 34년 군대내무규정서 재개정을 했다. 결국, 일본군은, 병사들의 자각에 대응한 내면적 충성을 획득 한다는 목적으로 새로운 이념 조직 원형을 만드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병사들의 인권을 인정도 안 하면서, 또 과거와 같은 준엄한 통제 일변도의 군기 유지로 돌아 갔던 것이다. 이런와중에 日中전쟁에 돌입하게 되니까, 병동원규모가 갑자기 늘어나는 바람에, 자질부족장교(상관) 들이 부하들을 충분히 장악 할수 없게 되었다. 군대생활의 혐오, 비판정신, 장교들에 대한 고참 하사관들의 경멸, 전체적인 군대내질서에의 반항들이 생겨, 군대내범죄 특히, 대상관범죄등이 증가 했다. 병영내에서 억압 되었던 병사들의 불만이 점령지 주민에 대한 불법행위로 치닫는것은 너무나 당연 한 일이 었던 것이다. 이것이 점령지에서 일어난 강간사건의 큰 테두리로 보는 풍조를 불러 왔고, 이런 사건의 다발성이 군정에 지장을 주었기 때문에 이의 보완 책으로, 성적위안시설의 확충 이라는 것으로 줄다름 치게 하는 악순환을 갖여 왔던 것이다. 실제로, 日中전쟁이후, "전시득이(戰時得利)"로서 강간을 줄였다는 긍정적인 반응을 하는 사람들이 일본군 장병속에 깊이 침투 되어 있기도 했다. " 강간사건을 일으키고, 기소 되었던 한 젊은 병사가 군법재판에서 진술 했던 내용에 공통 되었던 것중에, 고향을 출발 하기전 송별연에서, 이미 전쟁 임무를 마치고 귀향한 선배로 부터 중국전선에서는 재미있는 일이 있을 것이라는 말들을 했는데 이것이 강간을 암시하는 경우라고 하는 것이 비일비재 했기 때문에 이에 따른 군중심리 기분을 갖이게 되었다고 했다" 최초 중국전선에 투입된 신병이,,,,,,, 얼마나 풍기개념에 결핍되어 있었던가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 이다(前揭, "剛村寧次 大將 자료"전장회고록). 이러한 상황속에서, 일본군은, 군기를 유지 하려 했고, 병사(특히 하사관, 고참병)들을 , 무조건 명령에 복종하게 하기 위한 군 위안소의 설치가 필요 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 군인들 중에서 다음과 같은 견해가 나타나는 것 또한, 피할수 없는 현상이 었다. " 혈기 완성한 젊은 이 들이, 군대라고 하는 비인간적인 세계에서 신음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껍게 잛게' 라는 한탕주의로 때에 따라서는, 성욕의 수렁으로 빠져드는 것은 피할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草戶寥太郞'征途의果로'). 전장에서, "사물에 대응하기 위해서" 어덯게 던, 움직여야 하는 한은, 평상시 건전한 육체적 조건과 맹열한 정신을 수반 할 필요가 있다. 성욕의 조절은 육체와 정신의 조화제로서, 전쟁에서의 윤활유 이다. 군부가 위안소를 필수품화 한것은 전쟁담당자로서는, 당연한 것이 었을 것이다(直井正武"戰魂"). 

 

5). 위안부 제도의 필요악론(必要惡論),

  이 필요악논은, 인권침해 사실을 무시하고 일변도로 그것을 허가하는 조건이 되었다. 물론, 대부분의 장병이 군 위안소에 갔던 것은 아니다. 여성의 존엄을 중요시 했던지, 아니면 이성으로 성욕을 억제 하면서 위안소에 가지 않았던 장병들도 있었던 것 같고, 또는, 군위안소에 가는 것을 경멸 했다던가, 성병에 감연되는 것을 두려워 하며 가지 않았던 자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군위안소를 필요악 이라고 생각 했던 장병이 다수파 였다고 하는 것도 부인 할수 없는 사실이 라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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