歸去來兮, 陶淵明 ( 1) :

먼저번 글에서 인간은 習慣(습괌) 과 薰習(훈습)에서 얼바나 自由 로울까 ?하는 문제를 알아 보았다. 이번 글의 歸去來兮,  陶淵明(귀거례혜, 도연명) 본질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하는 글이라 해도 틀림이 없겠다.

위에 제시된 문장중 관습과 훈습이라는 두 단어가 있는데 여러분이 이해하고 있는 습관 즉 우리가  태여날때는 무색투명 했었는데 인간이 태여난후 주변 환경 으로부터 배워 얻은것 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렇다면 薰習 이란 ?  향내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옷에 스며드는것과 같은 것이라고불교 起信論(기신론)에 쓰여 있습니다. 의사에게서는 약내음, 생선가게 주인에게서는 생선 비린 내음,  이와는 별개의 이야기지만 인간에게서는 인격의 내음이 배여 나온다는 말이 있드시, 그것을 우리에게 薰習된 種子(종자)에 의하여 발현되는 것이라고 한다. 내면에 축적된 과거와 현재의 그  사람의 향내 라는것인데, 과거가 현재중에 흡수되여 그것이 현재로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 라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가 곂쳐저서 있는것이 나라는 것이다. 이 구조를  佛敎唯識論 에서는 阿賴耶識(아뢰야식) 제 8식 즉 현재는 과거에 규정 되여져 있다 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 현재에 우리가 얻어 갖이는 습관이란 없다는 것인가 ? 그렇지는 않다고 한다. 현재에는 과거의 규정 되여진 제약된 면과 현재 스스로가 자유롭게 배우며 결단 해 나가는 면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현재의 결단이 과거의 의미 또는 기능마저도 변화 시킬수 있다는 것이다. 스승에게서 단련만 된다면 말이다. 그 당시는 불망 이었고 한 스럽기 까지 했어도 어느사이엔가 그것이 감사의 대상이 되게 된다는 것이다. (유식론을 읽는 방법 41쪽 중에서 저자 太田久紀) 길게 단어 설명을 했는데 이 후습이 앞으로 이야기 해 나갈 도연명과 밀접한 관계가 지워 진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이 글에서 우리의 시인 陶淵明을 문학, 예술 장르에 끼친 인문학적 성과에 대해 폄하 하려는 마음이 추호도 없다는것을  밝혀 두겠다. 

陶淵明의 증조부 陶侃(도간)은 咸和 三年 (327) 十二月 蘇峻의 반군을 평정하고 실권을 장악한다. 당시 皇太后 의 兄(오빠) 이 었던  庚亮(경량) 은 지방군단을 약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당시 군권을 갖엿던 陶侃에게 압력을 가 했었는데  이것이 반란을 유도한 이유라고 하며  반란을 평정한 五溪출신  陶侃에게 귀족중의 귀족인 庚亮 이 머리를 숙이게 되였고, 그 이유로 그는 조정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긴말을 줄여서 , 咸和9년(334), 陶侃이 죽고 난뒤 庚亮은 征要將軍 ,江,豫,荊三州刺史를 겸하며 武昌에 주재 합니다. 武昌은 東晉의 군사기지 였는데, 그런곳에 귀족출신인 庚亮이 주둔하게 됨에 따라 귀족들의 자제들의 뫃여 들었고 그들은 거기서 벼슬을 하게 되는데, 記室參軍으로 등용했던 殷浩( 은호)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이것이 훗날 西府軍의 본거지가 된다. 陶淵明을 이야기 하려면 北府軍에 대헤 알아야 한다.

망명정부인 東晉은 당시 長江서쪽에 자리 잡고있던  成漢政權인 恒溫(항온) 軍에 대비할만한 인물을 찾아야 했다. 여기에 주목된 사람이 山東半島, 徐州등지에서 五胡十六國에 밀려 남하한 유민군단이었다. 이들의 주둔지는 楊州일대 였는데 西府軍정도의 세력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곳 楊州는 수도인 建康 방위거점임으로 중요한 지역인데 여기 주둔한 북부유민군을 西府軍에 대하여 北府軍이라 이름 하였고, 東晉政府는 당시 楊州刺史였던 慇浩에게 北府軍을 主宰(주재)하게 합니다. 그후 永和十年(354)이 되면 西府, 北府軍權을 장악한 恒溫은 北伐軍(洛陽탈환을 위한)을 조직 북벌에 나서지만 前秦의 수상 符雄에 의해 패배 하는데, 2년후, 江陵(湖北省)에서 다시 군대를 이르켜 洛陽을 탈환 합니다. 수도를 건강에서 洛陽으로 옮기게 됩니다. 이 때가 永和十二年(356) 입니다. 그리고 東晉, 前秦, 前燕 鼎立 時代 가 시작 되고, 지나면서 東晉江南에서 소위  江南春秋가 시작 되면서   우리의 시인 陶淵明의 무대가 펼쳐 집니다. 東晉 降年 三年 (399) 孫恩의亂이 일어 난다. 당시 東晉의 실권자 는 집정관(執政官은 司馬元顯이었는데 孫恩의 亂에 동방연안 소작인들을 징집 군무를 시키려 한다. 이것이 원인이 되여 열흘도 안되는 사이 수십만이 孫恩軍에 호응하게 되는데, 이 道敎계교단을 중추로한 조반군 토벌에 北府軍이 동원 되였고 용전하여 孫殷軍을 파멸시켜 도주 시킴니다. 우리의 시인 陶淵明도 北府軍에 종군하고 있었습니다. 그 증거로 두수의 시가 남아 있는데 降年三年 (399) 작이라는 설이 유력 합니다. 

詩題는 " 始鎭軍參軍作曲下經時  비로서 참군이되여 곡하를 지나면서" 라는 시이다.

자신은 琴(거문고) 과 讀書에 더 취미가 있었고, 그 때는 비록 窮乏(궁핍) 했지만 平安한 생활이 었는데, 이렇게 출정하면서 전원생활에서 멀리 떨어져 나와 있다. 언젠가는 자유를 즐길수 있는 곳으로 돌아가리라. 하며 희망을 술회한 詩였습니다. 詩題의 鎭軍이란 北府軍을 말 하며 鎭衛軍前將軍 劉宇之(잔위군전장군 유우지) 를 일컷는다. 參軍이란 참모를 말 하는데, 그는 아마도 記室參軍이 였으리라.

다른 하나의 詩는;

"辛丑歲七月복반(휴가를마치고)江陵還夜塗口行, 신축년 7월에 휴가를 마치고  강능으로 돌아와 밤에 도구로 떠남." 어찌된 일일까 ? 江陵과塗口는 다 같이 西府軍의 근거지. 그러니까 당시 그의 근무지는 西府軍이 었단 말인가. 江陵塗口가 그의 고향 廬山기슭에서 가까웠던 탓이 었을까.  당시 서부군의 총수는 恒玄, 동진 찬탈 일보직전 까지 갔던 恒溫의 아들이었다. 항현은 父의 야심을 실현 하려고 했던가 부패한 동진에 분노하고 있었던가 ? 어쨌던 평소에 조정의 사람들에게 비판적이었다. 부패 무능한 조정에 비하면  西府군 지역인 武昌을 중심으로 荊州는 수도 보다 아주 건전 했고 조정에 실망한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陶淵明도 그중의 한사람이 었을 것으로 추측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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