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에드워드 8세 (Edward VIII) 

생년월일 : 1894년 6월 23일
사망 : 1972년 5월 28일
출생지 : 영국 서리 리치먼드
가족사항 : 아내 심프슨 부인
화제 : 미국 출신 이혼녀 심프슨부인과 결혼하기 위해 국왕자리를 버리고 윈저공이 됨
윈저공은  조지 5세의 맏아들이다. 
조부 에드워드 7세를 닮아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황태자 시절에 세계 각지를 여행하여 상하 각층의 사람들과 널리 사귀었으며, 사회문제에도 조예가 깊어 인망이 높았다. 


조지 5세가 죽자 독신인 채로 즉위하였는데, 미국 출신의 이혼녀 심프슨부인과 열애, 1936년 12월 마침내 국왕 자리를 버리고 해외로 떠나 윈저공()으로서 그녀와 결혼하였다. 
부인과 함께 윈저성() 부지 내 프로그모어에 묻혔다. 

 

그들이 처음 만난 것은 1931년 1월 전형적인 영국의 사냥 여행에서였다.

당시 37세였던 왕위 후계자, 에드워드 8세는 국민들에게 사회적으로 

활발하게 참여하는 인물로 인식되어 있었고 왕자로서는 드물게 사회

 빈곤층을 방문하고 보살피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왕관을 버릴 만큼 사랑한 상대의 그녀는 베시 월리스 심슨…

당시 35세였던 그녀는 첫번째 이혼을 하고 선박 중개인이던 어니스트 심슨과 4년째 두번째 결혼 생활을 이어가고 있던 중이었다.



 

1936년 1월 조지 5세가 사망하자 맏아들이던 에드워드 8세가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여론은 자신들의 왕이 미국 이혼녀의 세번째 남편이 되는 것을 보고 있지 않았다.더군다나 그 때는 심슨의 두번째 결혼이 법적으로 끝나지도 않은 상태…

이에 에드워드 국왕은 스탠리 볼드윈 당시 총리에게

“결혼은 하되 신분은 결혼 전 것을 그대로 유지하겠으니 왕위에 계속 남아있게 해달라"고 요구했으나, 볼드윈 총리는 고개를 흔들었다.



에드워드 8세는 마치 예전에 헨리 8세가 앤하고의 결혼을 하기 위해 

토마스 모어를 찾아가 동의를 구한 것처럼 윈스턴 처칠을 찾아가 

동의를 구한다.
이때 처칠은 토마스 모어처럼 동의해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러자 에드워드 8세가 처칠의 어머니가 미국인 것을 거론했다. 이때 처칠이 말하기를 

<우리 어머니는 결혼 당시 숫처녀였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에드워드왕은 라디오 연설을 통해 심슨 부인과의 사랑을 고백,

국민들에게 직접 호소하려 했다. 

"나는 행복한 결혼 생활의 뒷받침을 받지 않고는

왕으로서의 나에게 끊임없이 부과되는 부담을 견딜 수 없다.

그래서 내가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하기로 굳게 결심했다.

심슨 부인과 나는 그녀가 여왕이 되기를 바라지 않으며

그저 내 아내로서 그녀에게 어울리는 적절한 직함과 작위를 바랄 뿐"이라고 말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비밀 각료회의에서는 왕이 당시 반대 세력이었던 윈스턴 처칠 등

야당력의 지원을 얻을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터져 나왔고,

볼드윈 총리는 정부의 승인을 받지 않고 대국민 성명을 발표하는 것은

헌법에 위배된다는 논리를 들어 왕의 라디오 연설을 반대했다.




점점 언론의 압박이 심해지는 가운데 심슨의 이혼이 이루어지자

이제는 어떤 결단이 필요했다.결국 그해 12월 에드워드 8세는 라디오에서 퇴위 연설을 한다.

"저는 황태자로서, 그리고 왕으로서

25년간 봉사했던 국가와 제국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여인의 도움과 후원 없이

왕로서 내가 원하는 대로 어려운 책무를 수행한다는 것이

불가능 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이 말을 남기고 왕위에서 물러나 그의 연인을 만나기 위해 구축함을 타고 떠난다. 사실 이 때 수사국 요원들은 심슨 부인의 방탕한 행적 등

흠을 찾아내기 위해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심지어 심슨 부인을 나찌의 스파이, 유태인 등으로 추정하는 보고서를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접촉 결과 보고서는 심슨 부인에 대해

"매우 성실", "스스로 일을 하려 하는 여인" 등 좋은 평판을 전하고 있다.

심슨 부인과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은 

"심슨 부인을 알게 되면 에드워드 왕이

왜 그녀에게 빠져들었는지를 금방 알게 된다"고 말했다.

보고서는 1934년 두 사람이 함께 갔던 배 여행과 관련,

 "심슨 부인은 매우 존경할 만한 여성이었다.

두 사람이 멀리 떨어진 방에 각자 투숙해 이상했다.

혹시나 해서 나중에 침대 시트를 살펴봤으나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는

한 여 승무원의 발언도 기록돼 있다.


1937년 프랑스 캉데성에서 결혼식 날 찍은 사진


그리고 1937년 6월 3일 왕실 사람들이 참여하지 않은 가운데 프랑스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이로서 그는 에드워드 8세가 아니라 윈저공이 된 것이다.
1937년 로이어밸리의 한 성에서 불과 16명의 하객이 참석한 가운데 심슨 부인과 결혼식을 올렸다..



결국 왕위에서 물러나 2년간 자의반 타의반의 망명 생활을 한 에드워드 전 국왕은 자신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동생 조지6세 국왕에게 "고국에 돌아가고 싶다"고 간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조지6세는 "형이 돌아오면 헌법적 갈등이 생긴다. 만약 내 허락없이 돌아오면 생활비 지원을 끊을 것"이라며 반대했다. 조지5세는 각료들에게도 편지를 보내 "메리 여왕(에드워드와 조지6세의 어머니)은 윈저 공작부인(심슨 부인)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1951년 팜비치에서

윈저 공은 1952년에 들어서야 동생의 장례식을 계기로 다시 왕실의 행사에 참여할 수 있었고,그와 그의 부인이 왕가 일원들과 함께 공식 의식에 초대받는 것은1967년에 와서야 가능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1972년 그가 후두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프랑스에서 결혼생활을 해 나간다.



 

그는 1939년 잠깐 영국에 들어 올 수 있었으며 나머지 여생의 대부분을 프랑스에서 보내다 1972년 세상을 떠났다. 조지6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엘리자베스 여왕은 에드워드8세가 세상을 떠나자 윈저 공작부인(심슨 부인)을 버킹엄궁으로 불러 살도록 허락했다



영국 공문서관리소는 29일 수사기관인 특수국(Special Branch)이 두 사람이 열애하던 1930년대 중반에 작성한 보고서들을 포함해 심슨 부인 관련 문서들의 비밀을 해제했다.

1936∼1937년 경찰보고서에 따르면 심슨 부인은 유부남 자동차 세일즈맨과 연정을 나눴다. 가이 트런들이라는 북부 잉글랜드 출신의 이 자동차세일즈맨은 "아주 잘 생기고 매력적인 모험가이며 좋은 집안 출신으로 춤 솜씨가 뛰어난" 것으로 묘사돼 있으며, 심슨 부인이 이 남자에게 비싼 선물과 돈을 준 것으로 기록돼 있다. 


수사국 요원들은 심슨 부인의 전 남편인 어니스트 심슨도 만났다. 어니스트 심슨은 "에드워드 왕이 1936년초 아내와 사랑에 빠졌으며 결혼하고 싶다고 알려왔다. 충격을 받았지만 결국 
이혼에 동의했다. 하지만 나는 영국관리들에게 내 아내를 설득시켜서 에드워드 왕의 왕위를 지키는게 나을 것이라고 충고했다.
왜냐하면 나는 내 아내의 심리를 알기 때문이다.확신하건대 내 아내는 에드워드 왕이 자기를 좋아하는 것 만큼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누군가 고위층이 아내를 만나 설득하면 
넘어갈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옮겨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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